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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원서동 창덕궁 서편 길이다. 원서동의 동명은 글자 그대로 창덕궁의 후원 서쪽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서동의 동명이 이루어지기 전의 이 지역의 동명은 원동(苑洞)이요, 또 그 이전의 동명은 원동과 같은 우리말 음인 원동(院洞)으 로서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 이 곳에서 원동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의 기록에서 부터이며 1914년에는 관상감(觀象監)이 있던 원서동 206번지 일대를 관상감골 혹은 관동(觀洞), 제생원이 있언 계동 140-2번지 현재의 원서공원 일대는 계동(桂洞) 혹은 제생동(濟生洞),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밖에 함춘원(含春苑)이 있었으므로 일대를 원골 혹은 원동(苑洞)의 일부를 합하여 원동으로 하였으며, 1936년 서울의 동리명을 모두 일본식 정(町)으로 고칠..
53. 원남동 경복궁에서 창덕궁을 지나 대학로 방향으로 가는 4거리가 원남동이다. 원남동은 창경원의 남쪽에 있다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원남동의 옛마을로 단우물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진 단우물골은 감정동(甘井洞)이라 불렀고 배오개에서 박석고개까지 일대는 통안 혹은 통내(統內)라 불렀으며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있던 마을은 신민동(新民洞)이라 하였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명나라의 지사들이 청국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청의 원수를 갚기위해 우리나라에 찾아와 조선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종묘의 동북쪽 담 아래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살게 하였으므로 신민동이라 하였다. 종묘 동쪽의 원남동 첫째 골목은 통통학골이라 했는데 통내의 넒은 골목이라는 뜻이고, 잣배기고개는 원남동 로타리에서 연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잣나무가..
52. 운니동 계동 현대사옥 건너편으로 운현궁이 있는 쪽이다. 운니동의 동명은 이곳에 있는 운현궁과 니동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운니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니동(泥洞)은 익선동과의 경계가 되는 소로(小路)의 남쪽인데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이곳을 니동으로 표시하였으므로 이 길을 진골이라 호칭해오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진골은 니동 뿐만 아니라 습동(濕洞)으로도 표기되는데 이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서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여지므로 니동으로 정착된 것은 영조 이후로 여겨진다. 교동국민락교 뒤의 고개는 비만 오면 땅이 몹시 질퍽거렸으므로 구름재 또는 운현(雲峴)으로 불렀는데 운니동 동명 유래가 된다. 서운관 남쪽의 고개이름이 운현이고 운현의 남쪽 근방 운니동 80·85·114번지 일대에 흥선대..
51. 와룡동 창경궁, 창덕궁과 성균관대학교 후문쪽이다. 와룡동의 동명은 임금이 기거하던 창덕궁이 있으므로 나라의 상서(祥瑞)인 와룡, 봉익의 이름을 따온데서 유래된다.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고개는 건양현(建陽峴)이라 하는데 「건양다경(建陽多慶)」에서 비롯되었으며 두 궁궐이 모두 역대 임금이 거처하던 곳이므로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다는 뜻을 지닌다. 와룡동과 묘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다락우물이 있었으므로 다락우물골, 다락골 줄여서 누동(樓洞)이라 하였다. 창경궁과 창덕궁이 있는 이곳을 와룡동이라 한 것은 옛날 동양에서 왕을 용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황제를 상상의 신령한 동물인 용에 비겨서 황제의 얼굴을 용안(龍顔), 앉는 자리를 용상(龍床)이라 하였으며 또 타는 수레를 용가(龍駕), 배를 용주(龍舟)라고 하였..
50. 옥인동 서촌마을에서 수성동계곡이 있는 지역이다. 옥인동의 동명은 옥동(玉洞)과 인왕동(仁王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옥인동의 동명이 유래된 옥동은 옥류동(玉流洞) 혹은 옥골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옥인동과 통인동에 걸쳐있는 지역이다. 옥인동 47번지 북쪽 돌벽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고 하는 「옥류동」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개인의 집 담안으로 들어가 찾아보기가 어렵다. 서로 혼용해서 사용된 동명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는 영조 때에 그려진 「도성지도(都城地圖)」와 「옥동척강(玉洞陟崗)」이라는 그림인데 둘다 겸제 정선의 작품으로 지도에는 옥류동으로, 그림의 제목에는 옥동으로 되어 있다. 그림은 세종의 왕자 영해군의 후손이 이춘제(李春 )의 집 후원에서 모임을 가진 후 청나라 청옹정제..
49. 예지동 광장시장과 청계천 사이의 지역이다. 인의동에서 종로4가를 지나 동남쪽으로 향하면 그 일대가 예지동인데 동학(東學)이 근처에 있으므로 유학의 대강(大綱)인 효제(孝悌), 충신(忠信), 인의(仁義), 예지(禮智)의 이름을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예지동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옛마을로는 냇골 혹은 냇게라고도 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것은 청계천변에 위치하므로 냇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냇골의 윗쪽에 자리잡은 마을은 상천변동(上川邊洞) 혹은 웃냇골·웃냇개라 하였다. 중구 주교동 146번지와 예지동 135번지 사이에는 효경교(孝經橋)가 있었다. 효경다리·효경교·효교(孝橋)라고도 불렸는데 『동국여지승람』『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영풍교(永風橋)로 되어있다. 부근에 소경들이 많이 살아서 소경다리라 하..
48. 연지동 대학로와 종로5가 사이 지역이다. 연지동의 동명유래는 이곳에 큰 연못이 있어서 유래되었다. 연지동을 이룬 냉정동(冷井洞)은 찬우물골이라 하는데 어의궁(於義宮) 남서쪽에 물맛이 매우 찬 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고 연지동은 연못골이라고도 한다. 연지동의 동명칭 유래는 이 연지동이 속하였던 방(坊)의 명칭인 연화(蓮花)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에는 동·서·남쪽에 연못이 있었는데 동지(東池)는 동성(東城)의 연동(蓮洞)에, 서지(西池)는 돈의문(敦義門) 밖 모화관(慕華館) 옆에, 남지(南池)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연못은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하고 이들 연못에서 나오는 연자(蓮子)는 왕실용으로 진공하였다. 그런데 동지가 성(城) 안인지 밖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47. 연건동 대학로 서울대학교 병원 인근이다. 연건동의 동명은 연화방과 건덕방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주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는 연건동에는 자연부락명이 여럿 남아 있다. 과동(果洞) 혹은 과목동(果木洞)이라 부르던 곳은 22통 일대인데 과실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고 남미탑동(南彌塔洞)은 남이탑골이라고도 불렀는데 남이탑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126번지 일대이다. 세조 대 명장(名將)이며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南怡)장군의 집터인데 장군이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을 입어 억울하게 죽은 후 원한 대문에 터가 세다하여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되자 폐가(廢家)가 되어 쑥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순조 때까지 그저 채소나 지어먹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하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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