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beat Explorer/3. 동대문구 (11) 썸네일형 리스트형 10. 휘경동 회귀역과 중랑천 사이의 지역이다. 휘경동의 동이름은 조선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徽慶園)이 있는 데에서 유래된다. 수빈 박씨는 판돈령부사 박준원(朴準源)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과 언행이 특출하여 정조 11년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한 후궁 간택에 수위로 뽑혔다. 같은해, 2월에 입궁하여 가순당(嘉順堂)의 궁호를 받았다. 이어서 정조 14년 6월에는 원자(후일의 순자)가 경복궁 집복헌에서 탄생하니 조정이 기뻐하였다. 정조 24년에는 원자가 세자에 책봉되고, 그 해 6월 왕이 승하하니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이 때 순조의 나이 겨우 11세이었다. 때문에 효의왕후가 수렴청정 하였지만, 생모인 수빈의 부조의 공이 또한 컸던 것이다. 수빈이 세상을 떠난 것은 1822년(순조22년)이었다. .. 9. 회귀동 경희대학교 인근이다. 조선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소 회묘(懷墓)가 있었던 데에서 유래된다. 처음 묘는 망우리에 있었으나, 연산군 4년(1498년)에 당시 경기도 양주 천장산(지금의 경희대학교 부속병원 뒷 뜰)으로 옮겼고, 연산군 10년(1504년)에 연산군이 생모의 묘를 높여 회묘를 회릉(懷陵)으로 고친 뒤 황릉처럼 꾸몄다. 연산군 폐위 후 회릉도 다시 회묘로 격하되고, 이후 1969년 10월 25일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이 '회터마을'을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일제는 '懷'자가 어렵다고 하여 '回'자로 바꾸고, 묘(墓)'자도 동네이름에 좋지 않다고 하여 '기(基)'자로 바꾸어 회기(回基)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동대문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 8. 청량리동 청량리역과 고려대학교 사이, 홍릉이 있는 지역이다. 淸凉里洞의 유래 청량리란 동명은 청량사(淸凉寺)라는 사찰이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청량사가 자리한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고 맑은 샘물이 흐르며 남서쪽이 확 트여 늘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청량사에 머물렀다고 하며, 1939년 7월 12일에 한용운 선생의 회갑연이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승려이자 불교학자인 박한영도 이 절 에서 기거했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판 글씨는 박한영의 글씨로 전해진다. (동대문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홍릉 청량리 먹자골목 7. 제기동 제기동 역에서 고려대학교 앞쪽까지의 지역이다. 유래 - 제기동 제기동이란 동 이름은 "제사를 지내는 자리(터)" 라는 의미 에서 비롯되었다 제기동은 본래 춘분과 추분에 나라의 임금이 직접 행차하시어 풍농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데서 비롯된 제단(祭壇:先農壇)이 있었다 하여 "제터"또는 "계터" 마을이라 불렀다. 계(제)터 마을을 한자로 뜻빌림(意譯)한 것이 제기동이다. 제기동은 "제사를지내는 터"에서 비롯되었듯이 그 제사를 올리던 터가 바로 선농단 이다. 선농단은 조선왕조가 개국하면서 농본정책을 펴, 일찍이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친 제신농씨(帝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 를 지내기 위하여 설치한 제단이다. 제사는 그 해의 풍년을 기원, 매년 경칩이 지난 뒤 길한날을 가려 왕이 친림하여 제사를 지내고 .. 6. 전농동 청량리역 뒤쪽에 위치한 전농동은 조선초부터 농업을 중시한 관계로 국왕의 친경지였던 籍田(적전, 일명 典農)이 있었기 때문에 典農里라고 명명 되었다. 典農洞은 조선초에 한성부 東部 仁昌坊에 속하였으며 영조 27년(1751)에 도성 수어를 위해 반포한 『都城三門分界總錄』에 보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 (城外) 典農里契로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東署 仁昌防 (城外) 東小門契典農里로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이 되자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는 京城府 인창면 전농리로 칭하고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는 경기도에 편입시켜 고양군 숭인면 전농리로 되었으나 1936년 4월 1일(총독부령 제8호) 경성부 확장때 편입되어 경성부 典農町(전농정)이 되었다. 19.. 5. 장안동 중랑천을 동쪽에 끼고 있는 장안동은 조선시대에는 장한벌 또는 장한평이라 부른데서 동명이 유래한다. 장한벌은 송정동과 답십리 사이에 있었던 벌판으로 조선시대 군마의 방목장이자 기마훈련장이었다. 이에 따라 '마장안벌'이라 하던 것이 '장안벌'로 줄여지고 이 명칭이 '장안벌' 또는 '장한벌'이라 불리게 되었다. 장한벌은 중랑천의 범람원이었으나 개화기로부터 차차 농토로 개척되어 비옥한 농토로 변하였다. 일본은 경술합방으로 국권을 침탈하고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장한벌의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소속을 시켰다. 이후 해방이 되고 미 군정하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신인 신한공사의 관리에 들어갔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의 농지개혁때 실제 경작자 들에게 분배되었다. 그 후 동대문 지역에 인구집중현상이 현저하여지.. 4. 이문동 중랑천 서쪽지역이다. 이문동은 조선시대 이곳에 오늘날의 방범초소 역할을 했던 이문(里門)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문이란 성문이나 일반가옥의 대문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으로, 큰 가로에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골목길 또는 큰길로 이어지는 작은 길 어귀에 마을문으로 설치된 것이다. 이문의 기원은 고대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던 것이나 조선시대의 이문은 국가적 방범시책으로서 세조년간에 처음 한성에 설치함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세조 11년(1465) 11월 8일 임금이 한성부에 이문을 설치하라고 명령하였고, 3개월 후인 12년 2월에 병조에서 보고하기를 " 경중의 이문에 숙직할 인원은 이문내의 사람으로 정했으며, 외방에도 이문을 설치했습니다. 경중의 이문내에 10호 이하는 매일밤 2인, 2.. 3. 용신동 (용두동, 신설동) 용두동과 신설동을 합쳐 용신동이 되었다. * 유래 - 신설동 동대문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신설동은 조선시대 동부숭신방(崇信坊)에 새로 설치한 마을이라 하여 신설계(新設契)라 하던 것을 갑오개혁 때 신설동(新設洞)이라 하였는데, 과거에는 이곳을「새말」또는「신리(新里)」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동대문시립도서관일대를「우산각골(雨傘閣里)」또는「우선동(遇仙洞)」이라고 하였는데, 우산각(雨傘閣)이란 조선 세종때 우의정을 지낸 하정(夏亭) 유관(柳寬) 선생이 살던 집을 부르던 이름으로 하정(夏亭)선생은 비가 오는 날에는 방에서 우산(雨傘)을 받쳐들고 비를 피했을 정도로 생활이 청렴(淸廉)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숭인동 동묘(東廟) 동쪽에서부터 신설동 남쪽 청계천로 변에는 타원형으로 자리..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