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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서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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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로구 개괄 (Jongno District) 1. 종로의 기원종로는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부터 수도의 역할을 담당한 지역이다.종로는 도성문의 개폐를 알리는 보신각종이 있는 종루(鐘樓; 종이 있는 누각)에서 기원하였고 1943년 4월 1일 區제도 정비시 종루가 있는 거리라는 뜻으로 종로라고 이름지어졌다. 2. 주요 지역5대 궁궐, 종묘와 사직, 청와대, 정부청사, 각종 대사관, 박물관 등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북악산, 인왕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세종로 네거리에 도로 원표가 있어 우리나라 도로의 중심이기도 하다. 3. 총 면적 및 인구수총 면적 23.91㎢, 주간 활동인구 200만명, 호적인구 140만명, 상주인구 17만명으로 대표적 주도심이다.   1. Origin of Jongno Jongno is an area that has se..
1-10. 종로구> 교북동 교남동의 북쪽으로 독립문까지 이어져 있다. 영천시장 건너편이다.교북동은 교남동과 연접된 지점인 곳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는 북쪽 동네라 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곧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로 교남파출소 앞에 석교(石橋)가 있어 다리의 북쪽을 교북동 남쪽을 교남동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교북동에는 영은문(迎恩門)과 독립문(獨立門), 모화관(慕華館)을 헐고 새로 세운 독립관(獨立館)이 있었다. 태종 7년(1407) 8월에 창건한 모화관은 영천동 69번지에 있었으므로 모화관의 앞에 위치한 영천동과 교북동에 걸쳐있는 마을을 관앞골 혹은 관전동(館前洞)이라 하였다. 교남동과 접한 78번지 부근일대에는 돌다리가 있었으므로 석교동 혹은 돌다리골·석다릿골이라 하였다. 교북동 11번지 일대는 교북동·행촌동·홍파동에 걸쳐..
1-9. 종로구> 교남동 서대문사거리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 현재는 경희궁 자이 앞쪽 상가가 있는 곳이다.교남동의 동명은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 북쪽, 곧 교남파출소 앞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다 하여 다리의 남쪽 동네를 교남동, 북쪽을 교북동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교남동의 동명 유래가 되고 있는 석교(石橋)는 1830년에 유본예(柳本藝)가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석교, 1864년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대동지지(大同地志)」에는 초교(草橋), 고종 초에 김정호가 만든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교량의 표시만 되어 있고 1902년 로얄 아시아틱소사이어티에서 간행한 「서울지도」에는 석교라고 표시되어 있다. 또 다리의 이름을 돌다리, 석다리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아 「수선전도」제작 당시에는 이미 석교였던 것으로 ..
1-8. 종로구> 관훈동 흔히 인사동 골목이라고 하는 곳이 관훈동이다.관훈동은 1914년 4월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관인방(寬仁坊)의 대사동(大寺洞), 청석동(靑石洞)의 각 일부와 훈동(勳洞)을 병합하여 방명이었던 관인방의 「관」자와 훈동의 「훈」자를 따서 관훈동이라 하였다. 1914년 관훈동의 관할구역이 된 대사동 지역은 인사동과 관훈동에 걸쳐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탑골공원 자리에 큰 절인 원각사(圓覺寺)가 있어 댓절골, 또는 한자명으로 대사동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함께 편입된 청석동(靑石洞)은 지금의 관훈동과 견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살고 있어서 청성동(淸城洞), 청성골이라 하였던 것이 변하여 청석골로 되었다.영조 27년(1751) 도성의 방어를 위해 주민자치 조직을 편..
1-6. 종로구> 관수동 흔히 약속을 잡을때 종로에서 보자고 하면 대개 관철동이나 관수동을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관수동은 피아노거리 옆 블록으로 종로3가역과 청계천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관수동은 1914년 4월 1일에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 이전 장통방의 입동, 비파동, 창곡동, 상판교의 각 일부를 병합해서 청계천의 유수(流水)를 관망(觀望)한다는 뜻에서 관수동이라 하였다. 관수동을 이룬 자연부락으로는 갓전골·도깨빗골·벙거지골·비팟골·웃너더릿골·작은갓전골·준천삿골이 있다. 이 가운데 도깨빗골은 관수동 91-1번지 한국전력 청계송전소가 있는 서쪽 첫째 골목으로 도깨비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름이 붙여졌다. 개화기 때 들어온 전기불을 흔히 도깨비불이라 하였으므로 한국전력의 변전소가 이곳에 처음 세워질 때 전기를 빗대어 도깨비라 ..
1-5.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종로타워에서 제일은행, 공평동꼼장어 있는 곳까지이다.공평동의 동명은 중부 견평방(堅平坊)의 전동(典洞), 금부후동(禁府後洞), 발리동(鉢里洞), 이문동(里門洞)의 각 일부와 괴동(槐洞)을 병합하여 견평방에 있는 금부(禁府)에서 공평하게 재판을 처리하다는 뜻을 따라 1914년 동명 제정 때 붙여졌다. 공평동 지역은 옛날의 운종가 즉 종루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지금도 그 남쪽 종로2가의 지역이 상가로 번창하고 있지만, 공평동은 옛날부터 종로 시전의 일부분으로 유명하였다. 옛날의 동계(洞契)관계를 보더라도 발리전계(鉢里廛契)에 바리동이 있고, 어물전계(魚物廛契)에 이문동(里門洞)과 후동(後洞), 향정동(香井洞), 수전동(水典洞), 승동(承洞)이 있었는데 이들 동(洞)중에 바리전, 즉 유기전이 있다 하여..
1-4. 종로구> 계동 현대건설 본사 건물 뒷쪽으로 가회동과 창덕궁 사이에 있다.계동은 원래 계동, 가회동, 원서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이 지역에 제생원(濟生院)이 있어서 제생동이라 하다가 변하여 계생동(桂生洞)이 되었는데 1914년 동명제정시 계생동의 명칭이 기생동(妓生洞)과 비슷하다 하여 계동으로 줄여서 고쳤다. 영조27년(1751)에 간인(刊印) 배포한 수성책자(守城冊子)중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북부 양덕방(陽德坊) 관내의 계생동이 대개 현위치에 기입되어 있음으로 보아서 영조 때 또는 그 이전부터 이 곳이 계생동으로 칭호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순조 말기의 편자로 인정되는 『한경지략(漢京識略)』각동조(各洞條)에서는 계생동에는 제생원이 있으므로 제생동이라도 칭하였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계생동이 되었다. 또 계생동에는..
1-3. 종로구> 경운동(Gyeongun-dong) 안국역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가는 삼일대로 큰길 쪽으로 인사동 뒷길부터 이어져 있다.경운동의 동명은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때 경행방(慶幸坊)의 '경'자와 부근에 있는 운현궁(雲峴宮)의 '운'자를 따서 제정되었다. 경운동에는 몇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석정동(石井洞)은 운현궁 남쪽에 있던 마을로서 돌로 된 우물이 있어 돌우물골이라 하였다. 석정동은 이를 한자명으로 옮겨 부른 것이다. 교동(校洞)은 향교동(鄕校洞), 향곳골이라고도 했는데 교동은 경운동·낙원동·종로2가~종로3가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한양의 향교가 있어 동명이 유래되었으며 향교동이라 불렀는데 줄여서 교동이 되었다. 경운동은 동쪽으로 운니동과 익선동이, 남쪽으로 낙원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관훈동이 있으며 율곡로를 경계로 북쪽에 안국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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