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마을에서 수성동계곡이 있는 지역이다.
옥인동의 동명은 옥동(玉洞)과 인왕동(仁王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옥인동의 동명이 유래된 옥동은 옥류동(玉流洞) 혹은 옥골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옥인동과 통인동에 걸쳐있는 지역이다. 옥인동 47번지 북쪽 돌벽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고 하는 「옥류동」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개인의 집 담안으로 들어가 찾아보기가 어렵다.
서로 혼용해서 사용된 동명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는 영조 때에 그려진 「도성지도(都城地圖)」와 「옥동척강(玉洞陟崗)」이라는 그림인데 둘다 겸제 정선의 작품으로 지도에는 옥류동으로, 그림의 제목에는 옥동으로 되어 있다. 그림은 세종의 왕자 영해군의 후손이 이춘제(李春 )의 집 후원에서 모임을 가진 후 청나라 청옹정제의 황후 나랍씨(那拉氏)의 진위겸진향사(進尉兼進香使) 부사(副使)로 연행라는 이춘제 일행이 청풍계를 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옥류동은 장안에서 명승처로 손꼽히는 곳이어서 고관들의 별장이 곳곳에 들어서서 연회와 시연이 그치지 않았고 옥류동의 각자(刻字)아래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이 냇물을 탄뢰란(灘瀨瀾)이라 불렀다. 이런 옥류동은 글자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처음에는 민가지대가 아닌 곡간(谷澗) 유수처(流水處)를 말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진다.
「도성지도」에도 옥류동은 인왕산 아래의 수원처(水源處)로 표시하고 있어 옥류동이란 처음은 인왕산 아래의 속간유수처를 지칭하였으나 차차 그 명칭이 확대되어 그 근처의 민가지대를 호칭하는 지명으로까지 옮겨 칭하였다고 할 것이다.
다음은 인왕동인데 기록에 인왕동이란 이름이 보이는 것은 세종 때부터인 바 인왕동이란 지명은 세종무렵부터 존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인왕산이란 지명은 어떻게 하여 생겼나가 문제인데, 이에 대하여 인왕동과 관계있는 것으로는 인왕산(仁旺山)과 인왕사(仁王寺)로 이들은 모두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므로 그 세가지는 상호간에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왕사는 태조, 성종 때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하며 연산군 때는 인왕산 복세암과 금강굴이 경복궁을 내려 누르고 있으므로 근방의 민가와 함께 철거토록 했다는 기사로 보아 적어도 연산군 때까지는 존속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인왕산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태조부터 세종 때까지로 이때는 서봉(西峯), 서산(西山)이라는 명칭 이었다. 인왕산의 명칭이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광해군 때로 「산에 옛날에는 인왕사가 있어서 그 이름으로 되었다」고 하여 인왕사에서 인왕사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연유에서 본다면 옥인동 역시 인왕사에서 단정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인왕사동에서 인왕동으로 변천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옥인동은 효자동 관할구역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데 북으로는 부암동, 청운동과 동쪽은 효자동, 남쪽에 통인동, 누하동, 누상동이 연결되어 있고 서쪽은 서대문구이다. 옥인동은 동쪽이 주거지역 서쪽은 자연녹지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어 실제 가용면적은 전체의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 이러한 옥인동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인왕산길과 동의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길이 중심도로이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수성동 계곡
박노수 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북학지
자수궁터
김수항집터
김수근집터
민규호집터
윤덕영집터
인왕산 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