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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종로1가 광화문역에서 종각역까지의 거리이다. 종로1가의 동명은 보신각 종이 있는 거리의 첫머리에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지금 종로1가일대는 성내를 중심으로 하던 옛날 서울에 있어서 동서남북 4정문의 통로를 연결하는 십자가였던 만큼 조선 초기 한양천도 진작부터 수도 서울의 중심지 대시가로 되었으며 저녁에 인정(人定) 아침에 파루(罷漏)로 대종을 쳐서 도성의 입문을 개폐하게 하던 종루(鍾樓)가 세워진 후로는 이 거리를 종루십자가 또는 운종가(雲從街)로 불렀다. 지금의 종로의 명칭도 이 십자가상에 종로가 세워진 데에서 연유하였으며, 또 조선의 한양전도 후 세워졌던 종로는 지금도 위치와 명칭은 바뀌었을 망정 십자가로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아서 세고(歲古)의 여운을 풍겨주고 있다. 종로1가는 조선시대에 시전상가(市廛..
61. 적선동 경복궁역 주변 지역이다. 적선동의 동명 유래는 이 지역이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적선방이었기 ?문에 지명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원래 왕가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에 이웃하고 또 의정부를 위시한 중요 관청과도 인접하여 있었기 ?문에 특별히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옛 글귀의 뜻을 취하여 이곳은 적선, 그 남쪽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 남측 일대는 여경이라 하였다. 적선동은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 서부 인달방과 적선방에 걸친 지역이었다. 적선동은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경복궁과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관아명칭에 따른 동명이 많았다. 월궁동(月宮洞)은 월성위궁골이라고도 하는데 여조의 둘째부마(月城尉) 김한신(1720~1758)이 살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김한신의 자는 유보(幼輔)..
60. 재동 안국역 헌법재판소 주변 지역이다. 재동은 잿골을 한자로 옮긴 데서 유래된다. 잿골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왕위 계승의 뜻을 품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심복인 권람(權覽)의 추천으로 한명회(韓明會)를 만나 단종7년(1453) 단종이 누이 혜경공주(惠敬公主) 즉 영양위(寧陽慰) 정종(鄭淙)의 집에 행차한 기회를 이용하여 무사들을 매복시키고, 어린 단종을 성실히 보필하는 황보인(皇 仁)등을 유인하여다가 참살할 때 이들이 흘린 피로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나므로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 초목회(草木灰) 즉 재를 모두 가지고 나와서 붉은 피를 덮으니 동중은 온통 회(灰)로 덮였다. 그 후부터 이곳을 잿골 즉 회동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그 회동의 잿골이 재동의 잿골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재동을 이룬 옛부락은 잿..
59. 장사동 종로3가역과 청계천 사이 세운상가가 있는 지역이다. 청계천 쪽의 사토(沙土)가 장사형(長蛇形)을 이루었으므로 그 뜻을 따서 장사동의 동명이 생겨났다.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개천(청계천)변에 위치한 동시에 돈화문(敦化門)앞을 흘러내려오는 하천이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어구에 자리잡은 장사동은 이와 관련된 옛지명이 많다. 장사동 20번지 서북쪽의 다리는 웃너더리 또는 상판교(上板橋)라 했으며 84번지 서북쪽 다리는 아래너더리 또는 하판교(下板橋)라 하였다. 중구 입정동 5번지와 장사동 20번지 청계천 사이에 놓였던 다리는 새로 놓은 다리라 하여 신교(新橋)·새다리라 불렀다. 이 다리 부근에는 화류장을 전문으로 만들어 장농집이 있으므로 화류교(樺榴橋)라고도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하리곳다리 하랑교(河浪橋)·하교(..
58. 인의동 종로4가 종묘 동쪽지역이다. 성균관의 아랫쪽에 있고 사학(四學)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있으므로 유학의 대강인 효제(孝悌), 충신(忠信), 인의(仁義), 예지(禮智)의 이름을 따서 인의동이라 하였다. 인의동은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가정동(嘉井洞)은 더운우물 부근에 작은우물이 있었으므로 개우물골이라고도 부른다. 연지동에 걸쳐 있는 곳은 연지골, 훈정동에 걸쳐 있는 지역은 후정동(後井洞)이라 부른다. 등자리(登子厘) 있는 마을은 등자동(登子洞)·등자전골·등잣골이라 불렀다. 한편 28번지와 이현궁지 일대는 대한제국시대의 보병연대가 자리 잡았다. 이중 28번지 일대는 후일 주택지구로 분할되었으므로 새로 생긴 터라는 뜻으로 생긴 터라는 뜻으로 새터 신기동(新基洞)으로 부른다. 인의동·종로4가·예지동..
57. 인사동 종로 탑골공원 옆 인사동 거리이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중부 관인방(寬仁坊)의 「인」자와 대사동(大寺洞)의「사」자를 취하여 지어진 것이다. 『한경지략』권2 각 동조를 보면 「대사동은 곧 탑사동(塔寺洞)인데 옛날에는 원각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한경지략』은 순조(1801~1834)연간에 지어진 책인데 이 때에는 대사동과 탑사동으로 혼용하여 불리워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러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인사동은 대사동에서부터 동명 유래가 되는데 댓절골·사동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졌으며 지금의 인사동과 관훈동 사이에 걸친 마을이다. 큰 절인 원각사(圓覺寺)가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향정동(香井洞)은 향우물골·향나무우물골·상우물골로도 불렀는데 우물 옆에 향나무가 있었으므로 명칭이..
56. 익선동 종로3가역 뒷쪽 지역이다. 익선(益善)이란 그 글자 그대로 '더욱 착하다' '더욱 잘한다'는 의미인데 중국의 한(漢) 고조(高祖)가 명장 한신(韓信)에게 "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고 잘 싸울 수 있느냐"고 물을 때 자신있게 "신(臣)은 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익선동의 동명은 용병(用兵)이나 글자의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정선방의 익랑(翼廊)골에서 비롯되었다. 익선동의 옛 지명으로는 돈화문로 73(와룡동 161번지) 앞에 다락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대를 다락골 또는 누동·다락우물이라 불렀다. 돌우물골은 석정동(石井洞)이라고 하는데 누동궁쪽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우물이 있었으므로 마을이름이 연유되었다. 한동은 한양골·한양동이라고도 불렀는데 낙원동·돈의동에 걸쳐 있..
55. 이화동 대학로와 종로5가가 이어지는 지역이다. 이화동의 동명은 지금 이화동 2번지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에서 유래되었다. 이화동의 옛마을로는 동숭동과 이화동에 걸쳐있던 쌍계동(雙鷄洞)이 있다. 기묘한 암석 울창한 수림에 두줄기의 맑은 시냇물까지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삼청(三淸) · 인왕(仁王) · 쌍계(雙鷄) · 백운(白雲) · 청학(淸鶴)이라 하여 도성안의 5대 명소 가운데 세 번째로 꼽혔다. 효제동은 효젯골 · 병골 · 호동(壺洞)이라고도 불렀는데 이화동 25번지 일대의 마을이다. 선조 때의 부제학 유숙(柳肅) · 승지 유섭(柳燮) · 유활(柳活) 3형제가 서로 처마를 잇대어 살면서 부모 모시기를 한결같이 하므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효자형제가 모여사는 집이라 부르던 것이 효자가(孝子家), 효제가(孝悌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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