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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1. 종로구

59. 장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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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역과 청계천 사이 세운상가가 있는 지역이다.

청계천 쪽의 사토(沙土)가 장사형(長蛇形)을 이루었으므로 그 뜻을 따서 장사동의 동명이 생겨났다.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개천(청계천)변에 위치한 동시에 돈화문(敦化門)앞을 흘러내려오는 하천이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어구에 자리잡은 장사동은 이와 관련된 옛지명이 많다.

장사동 20번지 서북쪽의 다리는 웃너더리 또는 상판교(上板橋)라 했으며 84번지 서북쪽 다리는 아래너더리 또는 하판교(下板橋)라 하였다. 중구 입정동 5번지와 장사동 20번지 청계천 사이에 놓였던 다리는 새로 놓은 다리라 하여 신교(新橋)·새다리라 불렀다. 이 다리 부근에는 화류장을 전문으로 만들어 장농집이 있으므로 화류교(樺榴橋)라고도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하리곳다리 하랑교(河浪橋)·하교(河橋)·화교(花橋)등으로도 불렀다. 장사동 148번지 아세아극장 앞 청계천에 놓았던 다리도 신교라 불렀는데 두 개의 신교 가운데 하랑교로 불려지던 것이 더 먼저 건설되었다. 또 장사동 55번지 동북쪽의 다리는 두껍다리라 했는데 다리의 두께가 두꺼우므로 명칭이 붙었던 것을 한자로 고치면서 섬교(蟾橋)라고도 불렀다. 중구 주교동 146번지와 예지동 135번지 사이에 놓였던 다리는 영풍교(永豊橋)·효경교(孝經橋)·효교(孝橋)·효경다리·새경다리·소경다리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는데 장사동과 예지동이 서로 연접해있으므로 장사동의 다리로 혼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판교와 하판교는 널판으로 다리를 놓았으므로 너더리 혹은 판교(板橋)라 불렀으며 두껍다리는 흙으로 만든 토교였다.

관수동 125·126번지에 준천사(濬川司)가 있어서 청계천을 비롯한 한성부 안 모든 하천의 준설을 담당하였으나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토사와 각 가정에서 버리는 각종 오물 등으로 번번히 하천 바닥은 메워지기 일쑤였다. 더구나 바닥에서 파낸 각종 오물이나 모래를 먼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특별한 오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모래는 그대로 개천변 언덕 위에 적치하게 되는 도성내에서 제일 큰 개천인 청계천변의 이곳은 모래 언덕이 마치 뱀처럼 길게 늘어진 형상으로 쌓여있었으며 이러한 긴 모래뚝은 최근세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성부 5부의 하나인 중부 청사가 있던 곳을 중부동·중붓골이라 불렀는데 수송동으로 옮긴 후에도 여전히 중부동이라 하였다. 두껍다리로 통하는 길목은 가운데피마병문, 웃너더리로 연결되는 곳은 웃피마병문, 아래너더리쪽은 아래피마병문이라 했는데 각각 한자로는 중피마병문·상피마병문·하피마병문이라 하였으며 특히 가운데피마병문에 있던 네거리는 관네거리로 통칭하였다. 병문은 길가에 있는 골목어귀로 종로3가에 피마동, 예지동과 종로4가에 하피마동이 있었으므로 피마동으로 진입하는 곳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장사동 83·84번지 일대가 아래피마병문, 돈화문로변의 20번지 일대는 웃피마병문이 되고 57·58번지 일대가 가운데 피마병문이다. 이곳을 지나는 작은 네거리가 관네거리다.

종로3가쪽 돈화문로 변에는 벙거지를 파는 점포들이 있었으므로 병거짓골 또는 모곡동(帽谷洞)이라 하였다.

장사동의 동명 유래가 되기도 하는 청계천은 광화문네거리에서 광통교까지만 일제 때 복개, 정돈한 상태에 있었을 뿐 나머지 구간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다만 1949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대광교에서 영미교에 이르는 3,240m 구간의 준설사업을 시행했을 뿐이다. 시가지 중심을 꿰뚫는 대배수간선(大排水幹線)이면서도 암거화(暗渠化)되지 않아 쓰레기와 토사(土砂)의 퇴적으로 해마다 하상(河床)이 높아져 자칫하면 범람의 위험이 뒤따르고 악취가 나므로 해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구간별로 준설을 해왔다. 복개하지 않은 채로 시내 중심을 흘러가는 하수로 양안(兩岸)주민들의 생활에 고통을 줄 뿐 아니라 경관상으로도 불량하였다. 한편 도심을 관통하는 도로의 부족으로 이를 복개하면 교통소통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관계기관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라 서울시의 본격적인 하수도 사업의 하나로 청계천을 복개키로 결정하였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4차에 걸쳐 시행된 청계천복개공사는 1차로 1958년 5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광교에서 장교(長橋)에 이르는 450m와 방산시장 앞의 30m, 1958년 12월부터 1960년 4월까지는 2차 시공구간으로 장교에서 주교(舟橋)까지 849.5m와 방산시장앞 120m, 1959년 9월부터 1960년 9월까지 3차 시공구간으로는 주교에서 방산교(芳山橋)까지 232m, 1960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제4차 시공구간은 방산교에서 오간수교(五間水橋)까지 677m를 복개하여 총길이 2,358.5m, 폭 16∼54m, 총 복개면적은 79,849㎡였다. 복개비로 소요된 공사비는 16억 6,170여만원으로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가까운 금액이었고 연 인원도 242,000여명이 동원되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좌우 양안에 사는 사람들은 정월에 연싸움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정월 대보름날에는 예지동과 장사동이 동서로 나뉘어 지거나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장사동·예지동이 한편이 되거나 남쪽의 주교동·수표동쪽 사람들이 한편으로 되어 연줄에 사기풀을 입히고 연줄끊기시합을 하는 고고매놀이도 성행하였다. 연줄을 끊은 쪽은 한해의 운수가 좋다 하여 아이들의 시합에 온동네 주민들이 모두 나와 응원을 하였다.

이름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던 청계천은 조선시대에 개천으로 불리웠으나 일제 때 바뀌었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자 점차 오염되어 조선시대에는 종종 조정에서까지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후퇴로 서울 시민이 남쪽으로 피난 간 얼마동안은 청계천물이 맑고 잔잔히 흘러 피라미떼가 몰려서 꼬리를 치던 때도 있었다.

장사동은 동으로 예지동, 남으로 청계천로를 경계로 중구 입정동과 마주보며 서쪽은 돈화문로를 경계로 관수동과 마주보고 있다. 북쪽은 종로3가와 맞닿아 있다. 철물 부속, 소방기구 및 전기, 전자부속상가가 대부분인 장사동은 조선시대부터 상공업 자본의 중민들이 많이 운집해 있었으며 그 맥락은 지금에도 이어져 청계천로를 따라 1평 내외의 크기에서 크게는 30평 정도에 이르는 점포에서 각종 상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세운상가

관수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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