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역 주변 지역이다.
적선동의 동명 유래는 이 지역이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적선방이었기 ?문에 지명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원래 왕가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에 이웃하고 또 의정부를 위시한 중요 관청과도 인접하여 있었기 ?문에 특별히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옛 글귀의 뜻을 취하여 이곳은 적선, 그 남쪽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 남측 일대는 여경이라 하였다. 적선동은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 서부 인달방과 적선방에 걸친 지역이었다.
적선동은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경복궁과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관아명칭에 따른 동명이 많았다.
월궁동(月宮洞)은 월성위궁골이라고도 하는데 여조의 둘째부마(月城尉) 김한신(1720~1758)이 살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김한신의 자는 유보(幼輔)인데 13세 때 영조의 제2녀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오위도총부 도총관제용감제조를 지냈으며 8법의 글씨를 다 잘 써서 애시책문(哀諡冊文)을 자주 썼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붕어다릿골은 붕어다리가 있다하여 붙여진 명칭인데 한자로는 어교(魚橋)라 하였다. 적선동 77번지 정부종합청사 부근 효자동쪽 입구에 있었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북어교(北御橋)로 되어 있다. 북어교에서 붕어교로, 다시 어교(魚橋)로 변하였다.
십자교(十字橋)는 서십자각(西十字閣) 서쪽에 형성된 마을로 서십자각다리가 있기 때문에 십자교라 하였고, 내자동 71번지와 적선동 사이에는 종침교(琮琛橋)가 걸쳐 있었으므로 부근의 마을은 종교동(宗橋洞) 혹은 종침다릿골로 불려졌다.
내자동과 적선동 경계 부근에는 장흥고(長興庫)가 있었다. 설치 당시에는 남부 호현방으로 지금의 충무로1가·회현동1가·남대문로3가 접경지대에 있었는데 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장흥고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장흥고동·장흥동·장흥곳골로 불렸다.
한편 장흥고동에 대해서 『한경지략』에 장흥동에는 옛날에 장흥고가 이곳에 있었고 읍취헌( 翠軒) 박은(朴誾)의 옛 집터이며 또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의 집으로 그가 손수 심은 소나무 한그루가 일찍부터 있다. 일찍이 좌상(左相) 김광국(金光國)의 집으로 쓰여지기도 했는데 김광국의 집은 새로 지은 것으로 구조가 너무 사치스럽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황폐하여 말썽이 되었던 옛집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일대를 설명하였다.
사은동(司 洞)은 사온섯골이라 하는데 적선동 170번지에 사온서(司 署)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부근의 적선동·세종로·도렴동에 걸쳐있는 마을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적선동은 북으로 통의동, 동쪽은 세종로, 남쪽에 도렴동이, 서쪽에 내자동으로 연접되어 있으며 사직로가 동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사 위를 지나는 사직로를 경계로 북쪽은 주택지구, 남쪽은 재개발된 상업업무중심지구로 확연한 구분이 되어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염상섭 탄생지
심희수 집터
박은 집터
사은서터
장흥고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