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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홍파동 서대문에서 독립문 가는 교남동 동쪽지역이다. 홍파동의 동명은 홍문동과 파발동의 첫글자를 각각 따서 붙여졌다. 홍파동은 천변동(川邊洞)·어수정동(御水井洞)·신촌동(新村洞)·월암동(月岩洞)·파발동(把撥洞)·홍문동(紅門洞)의 자연부락이 합쳐져 형성되었는데, 천변동은 개천께라고도 하며 교남동과의 접경부분이 된다. 교남동과 홍파동의 경계지점에 작은 내가 흘렀으므로 내의 좌우측에 있는 부락을 천변동이라 하였다. 어수정동은 어수우물골이라고도 한다. 행촌동 대신중고등학교 부근 지금의 사직로가 지나는 남쪽 끝에 어수우물이 있었으므로 그 마을을 어수우물골이라 하였다. 신촌동은 교북동 11번지 일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연변에 있는 홍파동 56번지 일대에 새말 혹은 신촌동이라 하였다. 월암동은 송..
85. 홍지동 홍은동과 부암동 사이 지역이다. 홍지동의 동명은 탕춘대성(蕩春臺城)의 관문인 홍지문(弘智門)에서 비롯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제정된 동명에 의하면 상평방(常平坊 :城外) 경리청계(經理廳契) 안에 홍지문내동(弘智門內洞), 삼지동(三芝洞), 남문동(南門洞)으로 되었다. 일제하 1914년 4월 1일 경성부 축소계획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편입되었을 때 삼지동, 남문동을 병합시켜 홍지리라 하였고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확장실시에 따라 경성부관할로 편입될 때 홍지정(弘智町)으로 되었다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동명의 일소에 따라 홍지동으로 되었다. 홍지동은 동명이 유래된 홍지문을 중심으로 마을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왔는데 홍지문 안쪽과 가까운 곳에 형성된 마을을 홍지문내동 혹은 줄여서 내동..
84. 혜화동 혜화동 동성고와 서울과학고 사이 지역이다. 혜화동은 성북구 삼선동과의 경계지점이 되는 고개에 도성(都城) 8문(門)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의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혜화동으로 편입된 옛 지명들은 오랜 옛날부터 불리어 온 자연부락 명칭들로 혜화동의 옛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상백동(上栢洞)은 혜화동과 동숭동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태종 때 박은(朴 )이 낙산(駱山)아래 이 곳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栢林亭)을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웃잣골로도 불렀다. 상토교(上土橋)는 혜화동과 명륜동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혜화동 132번지에 있던 흙다리 위쪽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웃흙다릿골, 줄여서 웃흙다리로도 부른다. 송동(宋洞)은 혜화동과 명륜1가, 명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효종 ..
83. 행촌동 독립문 동편지역이다. 행촌동은 1914년 동명 개정에 따라 서부 반송방(盤松坊)의 은행동(銀杏洞)과 신촌동(新村洞)의 마을을 합쳐 동명을 붙인데서 유래되었다. 행촌동은 조선시대의 자연부락이던 곡정동(谷井洞)·어수정동(御水井洞)·신촌동(新村洞)·은행동(銀杏洞)이 모여 형성된 동인 만큼 자연부락 이름에 얽혀있는 유래가 많다. 곡정동은 골우물골이라고도 하는데 어수우물골 아래에 있다. 골짜기에 우물이 있으므로 해서 붙여졌다. 인왕산 자락을 타고 내려와 형성되었으므로 골짜기가 여럿 있었는데 그중 독립문 가까이로 뻗어 내려간 골짜기 끝 행촌동 209번지에 우물이 있음으로 해서 일대의 마을을 골우물골이라 하였다. 신촌동은 새말이라고도 하며 독립문로로 편입된 지역과 교북동 1번지 및 골우물골과 연접된 지역을 말하는 모..
82. 필운동 사직단의 동쪽지역이다. 북쪽으로는 누상동(樓上洞)·누하동, 동쪽으로는 체부동(體府洞)·내자동(內資洞), 남쪽과 서쪽으로는 사직동(社稷洞)과 접해 있다. 조선 전기에는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 관할지역이었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인달방 내수사계(內需司契) 도가동(都家洞), 사직동계 사직동, 수성궁계(壽城宮契) 송목동(松木洞)·도가동·남정현(南征峴), 분선공계(分繕工契) 전정동(塡井洞)·필운대·구동(龜洞)이 필운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가동, 사직동, 송목동, 도가동, 전정동(塡井洞), 필운대, 구동, 대구도가동(大口都家洞) 등이 통합되어 필운동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출장소 제도 신설로 경성부 서부출장소 필운동이 되었다..
81. 평창동 정릉에서 북악터널 넘어 있는 지역이다. 평창동은 이곳에 선혜청(宣惠廳)의 평창(平倉)이 있었으므로 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평창동의 지형은 북한산 줄기가 뻗어 내린 관계로 평지보다는 계곡과 산이 많다. 평창동의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고종 때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평창동이 한성부 상평방(常平坊)내의 선헤청계에 속하여 있고, 그 후 일제강점기에 와서는 1914년 4월 1일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 평창동은 율목동(栗木洞), 월계동(月桂洞)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평창리라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광복된 후에도 곧 서울에 편입되지 못하다가 1949년 8월 13일 경기도 은평면 평창리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로 편입시키고, 동년 8월 14일 서대문구에 은평출장소를 설치하여 관할하에 두다가 1950년 3월 ..
80. 평동 서대문역 적십자병원쪽 방향이다. 평동의 동명은 거평동(居平洞)이라고 부르던 이름이 줄어서 된 것이다. 평동의 「평」은 「原」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서대문을 나서서 무악재에 이르기까지는 거의 평탄한 길이고 서쪽의 안산(鞍 山)기슭과 인왕산 사이에 낀 분지형에 속하는 지역이다. 평동은 조선초부터 반송방(盤松坊)에 속해 있으며 갑오경장 때 지하계(池下契)의 여러 동 중 평동이란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일제 1914년 4월 1일 경성부의 동, 정 명칭 및 구역을 공포할 때 평동 일부는 죽첨정(竹添町) 1정목과 교남동에 편입되고 그 일부가 평동이 되었으며 그 뒤 일제가 동, 정, 정목 등으로 불리던 명칭을 동을 폐지시켜 버리므로 해서 평동정이라 하게 되었다. 광복후 1946년 10월 1일을 기하여 왜식동명을 ..
79. 팔판동 청와대 동편 경복궁쪽으로 나오는 지역이다. 팔판동의 동명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여덟명의 판서가 살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조선 순조년간(1801~1834)에 저술된 『한경지략(漢京識略)』권2 각동조(各洞條)에도 팔판동의 유래가 되었던 8명의 판서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단지 팔판동은 서울에서도 자연 지리적 조건이 좋기로 유명한 곳인 만큼 8명의 판서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전설(傳說)에 그친 것이 아닐 것 같다. 이곳은 옛부터 「팔판서골」이라 하던 곳으로 아마도 주요 관아가 경복궁 남쪽에 위치해 있어 직주(職住)근거리의 편의성에 따라 경복궁 동북쪽에 인근하여 있는 이곳에 판서들이 주거지를 택하였을 가능성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복개된 삼청동길이 삼청동 계곡에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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