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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답십리1동 답십리역과 신답역 동북편 지역이다. ▣ '답십리' 지명 유래 ○ 답십리는 조선 초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고 새로운 도읍를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고 하여 답심리(踏尋里)에서 유래했다는 설, 도성(흥인지문)에서 10리 거리에 있다고 하여 답십리라 불리었다는 설, 이 지역의 넓은 들(논:畓)이 10리까지 뻗쳤다 하여 답십리(畓十里→踏十里)라 불리었다는 설이 있다. ○ 청계천 하류지역이었던 이 마을 일대에는 미나리깡과 채소밭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 조선조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 답십리계로,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 답십리로 되었다. 1. 주요 지역
동대문구 개괄 수도서울의 동부에 자리한 동대문구는 그 지역이 도성 4대문의 하나인 동대문(東大門 : 興仁之門의 속칭)밖에 자리한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동대문을 경계로 한 동쪽에 있음을 뜻한다. 조선 태조의 한양천도와 함께 한성부(漢城府)의 행정구역은 동(東)·서(西)·남(南)·북(北)·중(中)5부(部)호 나뉘게 되고 이는 다시 52개 방(坊)으로 세분화되었는데 이 가운데 동부의 12개방은 성내(城內)의 10개방과 성밖(城外)의 2개방이었다. 성밖의 2개방은 숭신방(崇信坊), 인창방(仁昌坊)으로 오늘날의 동대문구는 물론 성북, 도봉, 성동구의 일부지역까지 그안에 속해 있었다. 고종 4년(1867)에간행된 육전조례에는 2방(坊)에 속한 동계명(洞契名)이 보이는데, 여기에 따르면 숭신방(崇信坊)에는 숭신동계· 월곡리계· 미..
1. 소공동 시청 앞쪽 조선호텔 인근지역이다. 소공동 (小公洞) 동명은 이곳에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집이 있어 속칭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1947년 6월 서울시령 제2호로 동회제도를 시행하면서 소공동과 남대문로2가동의 관할구역을 통괄하는 남대문로2가 동회가 설치되었는데, 1948년 10월에 소공동회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1950년 남대문로2가 · 소공동회가 되었다.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로 행정동 제도가 시행되면서 동회는 폐지되고 흥천동이 설치되어 태평로2가 · 남대문로2가 · 소공동 · 북창동 일원을 관할하였다. 1970년 5월 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로 행정동과 관할 법정동을 일치시키면서 흥천동은 폐동되고 소공동이 설치되었다. ..
중구 개괄 중구의 행정 구역은 15개의 행정동으로 나눠서 관리되며, 면적은 9.96 km²이다. 서울 중구의 인구는 2018년 2분기를 기준으로 61,091 세대, 135,427명이다. 1943년 4월 1일 구제도 실시를 전제로 경성부 전역에 7개 사무소가 설치되어 중구지역에는 중앙사무소가 설치되었고, 동년 6월 10일 구제도가 실시되어 경성부 직할구역소로 중구(행정관청 명칭은 중구역소)가 설치되었다.[2] 이 때의 관할 구역은 북미창정, 남미창정, 장곡천정, 태평통1정목(丁目), 태평통2정목, 남대문통, 봉래정1정목, 봉래정2정목, 욱정(旭町)1정목·2정목·3정목, 장교정, 무교정, 다옥정, 명치정1정목·2정목, 남산정1정목·2정목·3정목, 영락정1정목·2정목, 본정1정목·2정목·3정목·4정목, 대화정(大和町) ..
90. 훈정동 종묘이다. 훈정동의 동명은 이곳이 원래 더운 우물물이었으므로 이를 한자로 옮긴데서 유래되었다. 훈정동의 동명은 종묘 앞 시민광장 안의 훈정동 66-5번지에 있는 더운 우물에서 비롯되었다. 어수(御水)우물, 한우물도 불리는 이 우물은 여름에는 물맛이 얼음처럼 차고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따스할 뿐만 아니라 달작지근하여 종묘대제(宗廟大祭)때에는 반드시 이 물을 길어서 사용했고 임금의 어수(御水)로 사용했기 때문에 명칭이 유래되었다. 크다는 뜻과 많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우물」에서 「한우물」혹은 대정(大井)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는데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수량이 고갈되지 않고 홍수가 져도 넘쳐나는 법이 없이 일정한 수위를 지니고 잇는 것이 이 우물의 특징이다. 이 우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훈정동·..
89. 효제동 대학로에서 종로5가 방향 지역이다. 효제동의 동명유래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곳에 부왕(父王)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던 효종대왕의 잠저(어의궁)가 있었던 데서 연유하며 또 하나는 이 동의 윗쪽에는 성균관이 있고, 인접한 종로6가에 4부학당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위치하여 유학(儒學)이 성하던 곳이라 해서 유학의 대강인 인의, 예지, 효제, 충신 등을 이 인근 일대의 동명으로 삼으므로써 효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효제동에는 오랜 옛날부터 불려져 오는 옛 자연부락의 명칭과 지형지물에 관한 명칭들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오고 있다. 우물가에 회화나무가 있기 때문에 회화우물·홰우물·괴천(槐泉)이라 불렀고 인근의 마을은 회화우물골·괴천동(槐川洞)으로 불렀다. 종로5·6가 동사무소가 있는..
88. 효자동 청와대 옆 청운효자주민센터 남쪽지역이다. 효자동의 동명은 이곳에 있던 원래의 자연부락 효곡(孝谷)에서 유래되었다. 효곡은 고종31년 갑오개혁때에도 동명중의 하나로 보이는 것으로서 그 유래가 오래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동명은 원래 이곳에 임천조씨(林川趙氏)의 쌍효자가 나서 유명하였기 때문에 「쌍효잣골」「효잣골」로 불러온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쌍효자란 조원(趙瑗)의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 형제를 말함이며 나라에서 이들에게 내린 정문(旌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이래로 다른 동리들의 일부까지 포함하여 「효자동」으로 불러오게 되었으며 일부에서는 효에 대한 새로운 일식을 이야기하고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윤리의 관념이 많이 변천된 오늘에 있어서도 효자동의 동명은 새삼 옛날의 윤리관과 가..
87. 화동 삼청동 동편 북촌이다. 화동의 동명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화개동(花開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화개동은 화기도감(火器都監)이 있었다는 설과 함께 화유(花 ), 화과(花果)의 일을 담당하는 장원서(掌苑署)가 화동 23번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꽃을 기르고 있으므로 글자 그대로 화개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줄여서 화동(花洞)으로도 불렀다. 화개동은 화기동(火器洞)이었던 것이 변하여 화개동으로 되었다고도 하는데 원래 이곳에 화기도감(火器都監)이 있었기 때문에 화기동이 되다가 음이 비슷한 화개동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화동을 이룬 자연부락으로 동곡(東谷) 혹은 동골이라 부르는 곳은 가회동과 연접되는 정독도서관 동남쪽이며 붉은 잿골은 화동, 안국동, 재동에 걸친 마을로 붉은 재가 있어서 이를 한자로 옮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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