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beat Explorer (300) 썸네일형 리스트형 70. 창신1동 동대문역과 동묘역 사이 지역이다. 창신동의 동명은 조선초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방(坊) 가운데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 동명 개정 때 제정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창하고 한성부의 행정관할 구역을 제정할 때부터 있어왔던 창신동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자연부락의 이름도 많다. 창신1동(Changsin1(il)-dong) 지금의 청계천이 완전 복개되어 청계천으로 모여드는 지천(支川)까지도 없어졌지만 창신1동 3.1아파트 1동 앞에는 복차천(伏車川)이 흘렀고 이 개천에 놓인 다리를 복차교라 하였다. 복차교는 복차다리 혹은 복초다리라고도 불렀으며 부근의 창신1동 531번지 일대를 복초다릿굴, 복차교동, 복차동이라 하였다. 이스턴호텔이 있는 부근의 마을은 도성(都城).. 69. 창성동 경복궁 서쪽 지역이다. 창성동의 동명은 갑오개혁 때 북서 순화방관하에 사재감상패계 창성동(昌成洞)의 '성(城)'자와 순화방내 사재감하패계의 동명중에 장성동(長城洞)이라는 동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장성' 또는 '창성'으로 이름하는 옛날의 고성지(古城址)라고 있는 데에서 온 것은 아닌가 생각되나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서 중에서 그러한 고성의 유지(遺址)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성지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고 「청송당(聽松堂)」이 음이 서로 비슷한 관계로 하여 창성동(昌城洞)으로 변하고 성과의 관련이 없는 창성(昌城)이 무의미하는 점에서 다시 글자의 음이 같은 '성(成)'자로 바꾸어서 「창성동(昌成洞)」으로 아화(雅化)되어 유래된 것 같다. 창성동을 이루고 있는 .. 68. 중학동 동십자각 건너편쪽이다. 중학동은 88번지 일대에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으로 4부학당의 하나인 중부학당(中部學堂)이 있었으므로 명칭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중학(中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중학동은 삼청동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중학천과 백운동에서 시작하여 경복궁 앞으로 흘러내린 두 물이 마주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중학교(中學橋)는 중학동 88번지 서쪽에 있던 다리로 중학 앞에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중학교중학다리로 불렀으며 근방에 형성된 마을은 중학교동(中學橋洞)·중학다릿골·중학동이라 하였다. 중학동과 세종로에 걸쳐있는 마을은 수문동(水門洞)·수문골이라 불렀는데 중학천으로 흘러들어가는 수문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며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된 곳으로 정부합동 민원.. 67. 종로6가 동대문역 인근 지역이다. 종로6가는 종로에서 여섯번째의 거리라는 뜻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종로6가에는 한성부 4부학당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있었기 때문에 이와관련된 지명이 많다.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자리는 조선시대 4부 학당의 하나인 동학이 있었으므로 일대의 마을을 동학동이라 하였다. 동학골 서쪽에 위치한 마을은 동학이 있어 선비들을 길러냈으므로 양삿골, 양사동(養士洞), 양인사동(養人舍洞)으로 불렀다. 313~320번지 일대는 대학천과 청계천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섬처럼 보였기 때문에 섬말 도촌(島村)이라 하였다. 종로6가의 상인들이 관원의 착취를 꺼려 집 앞채를 납작하게 짓고 방망이 같은 살창을 하여 겉으로는 어려운 것처럼 꾸미고 안채는 훌륭하게 지었기 때문에 두방망잇골·쌍.. 66. 종로5가 종로5가역에서 동대문 방향의 지역이다. 종로5가의 동명은 종로에서 다섯번째의 거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종로5가는 남쪽으로 청계천, 동쪽으로는 성북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두다릿골은 종로4가와 종로5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두다리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이교동(二橋洞)이라고도 불렀다. 이교(二橋)는 두다리 외에도 재교(再橋)·연못골다리·연지동교(蓮池洞橋)로도 불렸는데 연못골과 연결되던 곳으로 종로5가 78번지와 효제동 331번지 근방을 이어주던 다리이다. 동대문에서 종로쪽으로 두번째 다리가 된다. 웃냇골은 개천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상천변동(上川邊洞)으로 불렸다. 청계천에 면한 지역이다. 한우물골은 큰 우물이 있으므로 한우물 또는 대정동(大.. 65. 종로4가 종묘에서부터 광장시장까지의 거리이다. 종로4가의 동명은 종로의 네번째의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비롯된다. 종로4가는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다. 묘동(廟洞)은 대뭇골·대묘동(大廟洞)·대묘골 등으로 불려졌는데 종묘(宗廟)가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하피마동(下避馬洞)은 아래피맛골이라고도 하는데 종로4가와 예지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피맛골 아랫쪽에 위치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종로4가와 5가 사이에는 두다리 혹은 이교(二橋)·재교(再橋)·연못골다리·연지동교(蓮池洞橋)라 부르던 다리가 있었다. 동대문 쪽에서 두번째 다리가 되므로 붙인 이름이며 옛날의 연지동에 속했기 때문에 연못골다리라 했었다. 종로4가는 종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종로선과 종로4가(후에 돈암동까지 연장)까지 연결되는 전차노선이 있어서 더.. 64. 종로3가 탑골공원 동편부터 종묘까지의 거리이다. 종로3가의 동명은 종로에서 세 번째의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종로3가는 조선시대 여러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엇으나 지금은 그 위치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종로3가는 종루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이와 관련된 시전상점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명주전골은 종로3가·낙원동·돈의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명주전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주동(紬洞)이라고도 하였다. 벙거짓골은 종로3가·관수동·장사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벙거지전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모곡동(帽谷洞)이라고 하였다. 행랑뒷골은 종로3가에서 6가까지 행랑을 지었는데 그 뒤에 있던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웃너더리는 장사동(長沙洞) 근방.. 63. 종로2가 종각역에서 탑골공원까지의 거리이다. 종로2가의 동명은 종로의 두 번째 거리가 된다 하여 유래되었다. 종로는 조선시대에 종루가(鐘樓街)·종가(鍾街) 또는 운종가(雲從街) 등으로 불렸다. 종로는 세종로 사거리 황토현에서 종로6가까지의 거리로 네거리에 층루(層樓)를 짓고 누(樓)위에 종(鐘)을 달고 그 아래로 사람과 우마(牛馬)가 다니게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보신각(普信閣)·종각(鐘閣)으로 불려지는 이 누각은 지금의 종로네거리에 있었으나 1915년의 남대문로 개수공사를 위한 도시계획에 따른 종로의 확장으로 원래보다 동남쪽으로 물러나 관철동에 2층 누각으로 새로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종각이 불타고 초석만 남게되자 이곳은 상인들의 노점터가 되었고 그 옆에 종각을 새로 세웠는데 규모가 작았다. 1.. 이전 1 ··· 24 25 26 27 28 29 30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