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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1. 종로구

70. 창신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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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역과 동묘역 사이 지역이다.

창신동의 동명은 조선초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방(坊) 가운데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 동명 개정 때 제정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창하고 한성부의 행정관할 구역을 제정할 때부터 있어왔던 창신동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자연부락의 이름도 많다. 창신1동(Changsin1(il)-dong)

지금의 청계천이 완전 복개되어 청계천으로 모여드는 지천(支川)까지도 없어졌지만 창신1동 3.1아파트 1동 앞에는 복차천(伏車川)이 흘렀고 이 개천에 놓인 다리를 복차교라 하였다. 복차교는 복차다리 혹은 복초다리라고도 불렀으며 부근의 창신1동 531번지 일대를 복초다릿굴, 복차교동, 복차동이라 하였다.

이스턴호텔이 있는 부근의 마을은 도성(都城) 바로 밑에 형성되었다 해서 성밑굴 혹은 성저동(城底洞)이라 하였고 창신1동 82번지 일대는 연못이 있고 정자가 있었다하여 정자동(亭子洞)이라 하였다. 이 연못은 동지(東池)라 불렀는데 서대문 밖의 서지(西池), 남대문 밖의 남지(南池)와 함께 연꽃이 많이 심어져 있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서지의 연꽃이 많이 피면 서인(西人)이 득세하고 동지의 연꽃이 많이 피면 동인(東人)이 득세한다 하여 동서양당(東西兩黨)이 서로 상대방에 해당하는 연못으로 몰래 잠입하여 꽃이 못피도록 꽃대를 부러뜨린 경우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연못들도 1930년을 전후해서 매립되었다.

동덕여중고가 있던 창신1동 225번지 일대는 새말이라 불렀다. 동덕여학교를 짓기위해 부지(敷地)를 물색할 때 사람들이 모여 새로 마을을 형성하여 살게 되었으므로 새말 혹은 신촌(新村)이라 불렀다. 창신1동 195번지 일대의 궁안우물에서 넘쳐 흐르는 물은 작은 개천이 되어 청계천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이 개천위에 쪽나무를 놓은 다리가 있어 남교(藍橋) 혹은 쪽다리라 불렀는데, 창신1동 276일대를 말한다. 영미다리에서 오간수교를 지나 3.1아파트까지의 청계천변은 뚝섬, 광나루까지 운행되던 기동차 길이며 이스턴호텔과 한전변전소 자리는 기동차 시발지역사였다. 동대문 로터리에서 청량리역까지의 왕산로에는 6.25동란 직후 약3~4년간 역마차가 운행되었다.

창신1동 327-27번지에는 우리나라 초창기 아파트 구조의 하나로 알려진 동대문아파트 131가구가 1965년에 건축되었다. 아파트라는 개념이 도입된지 얼마되지않아 아직도 「답답한 생활공간」으로 여기는 일반인들에게 동선(動線)의 단축과 연료의 혁신 등으로 주거개념 자체를 일환시킨 건물이다.

또한 1969년 5월 15일과 8월 15일에 각각 기공된 3.1시민아파트는 1968년 10월 16일 도심쪽 윤락가(淪落街) 전면 철거 계획에 따라 청계천변을 정리하는 한편 청계천 복개공사를 위한 부대사업으로 진행되었다. 1969년 9월까지 창신동 방면의 이들 무허가 판자집을 모두 철거하고 높이 10층의 서민 임대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겠다는 계획 아래 추진되었다.

현재의 창신1동은 왕산로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의 동은 청계로를 경계로 중구 신당동, 북쪽의 동은 지봉로를 경계로 동쪽에 숭인1동, 숭인2동이 있으며, 서쪽은 창신2동, 북쪽에 창신3동이 자리잡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영미교터

원흥사지

궁안터

오간수교터

동대문 신발 도매상가

창신동 네팔음식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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