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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안국동 안국역에서 북촌쪽 지역이다. 안국동의 동명은 이곳이 조선초기부터 있어오던 북부 10방 중의 하나인 안국방의 방명을 그대로 동명으로 한데서 유래된다. 대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선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의 지역을 차지하였던 북부의 여러 방은 북악, 인왕의 두 산아래에는 비록 인구는 희소할 망정 연적이 넓고 경치가 좋은 곳도 많았지만, 그 이남 즉 경복궁 동서쪽의 지역에는 방리의 면적이 그리 넓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한 방내의동, 계도 그 수효가 많지 않았다. 안국방도 다른 경복궁 동측에 자리잡은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방(嘉會坊)등과 같이 영조 때의 기록에서도 방명을 그대로 동명, 계명으로 한 안국동계(安國洞契)하나 만이 보인다. 이러한 안국방, 안국동이 갑오개혁때에 이르러서는 많이 발전하였던 모..
45. 신영동 세검정 인근 지역이다. 신영동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5군영(軍營)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신영동 219 - 4번지로 이전하였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고종 4년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 상평방에 처음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 상평방내 경리청계에 속한 동명에서 신영동이 기록되어 있다. "상평방 경리청계 : 무계동, 부암동, 백석동, 홍지문내동, 삼지동, 구기동, 응암동, 왕정평, 신영동, 남문동"라고 적혀있다. 신영동의 명칭이 붙여진 유래를 『궁궐지(宮闕志)』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찾아보면 조선시대 5군영 중의 하나인 총융청으로 영조 때 북한산성 수비를 담당시키고 그 청사를 창의문 밖으로 이전시켰다고 하였다. 따라서 총융청이 새로 영조되었다 해서 신영동이라고 호칭된 것이다. 원..
44. 신문로2가 경희궁 인근지역이다. 신문로2가의 동명은 돈의문(敦義門)을 새로 지은 성문이라는 뜻을 한자로 옮긴 것에서 비롯된다. 신문로2가는 경희궁과 돈의문이 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옛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농포동(農圃洞)은 농포안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 밖 신문로2가 7번지 일대에 채소를 가꾸는 농포가 있고 내관(內官)들이 관리했으므로 농포가 있던 일대를 일컫는 명칭이다. 새문동(塞門洞)은 태조 때 건축한 서대문인 서전문(西箭門)을 세종 때 폐지하고 그 남쪽에 새로 돈의문(敦義門)은 세웠으므로 서전문을 막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서전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사직터널 근방으로 추측되는데 사직동쪽 신문로2가 1번지 일대가 새문동에 해당된다. 순라동(巡邏洞)은 술랫골 혹은 순..
43. 신문로1가 광화문 흥국생명 건물부터 광화문역까지의 영역이다. 신문로1가의 동명은 서대문(西大門)의 속칭이 새문이므로 이를 한자로 옮겨 적은데서 유래된다. 신문로라는 지명은 길가 서쪽 언덕위에 도성(都成)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서대문은 원명이 돈의문이었으며, 또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됨에 따라서 서전문(西箭門), 신문(新門), 새문으로도 불렸다. 1914년 서대문정이 형성되기 전에도 이 부근에는 신문내라는 동리가 있었으며, 그 곳을 새문안 그 지역내에 있는 교회를 새문안교회로 부르는 것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문로1가는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번잡한 곳에 속하였다. 따라서 여러부락이 합쳐져서 신문로1가를 형성하였는데..
42. 신교동 청와대 서편 청운동 옆쪽으로 통인동과 자하문터널 중간에 있다. 신교동의 동명은 신교동 70번지 신교소방관 파출소와 궁정동 9번지 사이를 연결해주던 새 다리가 있었던 동(洞)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옮긴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지금은 이름뿐 복개시설로 인하여 다리의 형체를 볼 수는 없다. 경우궁(景祐宮)과 경복궁(景福宮)사이를 흐르던 냇가의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신교는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표시가 되어 있으나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인왕산 아래 백운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동남으로 흘러 자수궁교(慈壽宮橋)와 금청교(禁淸橋)를 지난다」라고만 표기되고 신교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므로『한경지략』이 저술된 1830년부터 「대동지지」가 제작된 1864년 사이에 신교가 만들어진 것으로 여..
41. 숭인2동 동묘역과 신설동역 사이의 구간이다. 숭인동의 동명은 1914년 동명 개정 때 조선초부터 있었던 한성부 숭신방과 인창방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숭인2동(Sungin2(i)-dong) 낙산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청계천으로 유입되기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개천들이 여러 갈래 이어져 있었는데 특히 창신동 방면에서부터 이어온 개천에는 쪽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져 있어 이를 쪽다리 혹은 남교(藍橋)라 하였고 다리 근방에 형성된 마을은 쪽다리골, 남교동이라고도 하였다. 또 영미다리가 있는 곳은 영미다릿굴 혹은 영미동(穎眉洞), 연미정동(燕尾亭洞)이라고도 하였다. 동묘(東廟)가 있는 곳에 형성된 마을은 동묘동 혹은 동못골이라 하였다.동묘의 북쪽에는 시장이 있었으므로 장거리(場巨里)라 하였다. 장거리의 시장은 조..
40. 숭인1동 동묘역과 창신역 인근의 지역이다. 단종이 유배가며 부인과 헤어졌다는 동망봉이 있다. 숭인동의 동명은 1914년 동명 개정 때 조선초부터 있었던 한성부 숭신방과 인창방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숭인1동(Sungin1(il)-dong) 창신제3동과 인접한 숭인1동 53, 56, 61번지 일대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신리(新里) 또는 새말이라 하였다. 현재의 숭인1동은 왕산로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에 숭인2동과 성북구 보문동이 있으며, 지봉길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 창신1동과 창신3동이 서로 이웃하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정업원구기 동망봉터 청룡사 우산각골
39. 수송동 광화문 뒷쪽, 종로구청이 있는 지역이다. 수송동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의 개편을 위한 부제(府制)실시에 따라서 이전의 중부 수진방(壽進坊)의 수동(壽洞)과 송현(松峴)의 각 일부와 박동( 洞), 괴정동(槐井洞)과 징청방(澄淸坊)의 중학교(中學橋) 일부와 사복동(司僕洞)을 병합한 것인데, 수동과 송현의 첫 자인 「수」와 「송」을 각각 따서 수송동이라 하였다. 수송동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광화문우체국까지 6조(曹)거리의 뒷편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관아(官衙)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갑오개혁때 중서(中署) 수진방내의 계(契), 동(洞) 관계룰 보면 수진궁계 : 수동, 박동, 괴정동 송현계 : 송현 제용감계 : 수동 사복계 : 수동 상동계 : 상동 으로 되어 있어서 이때까지도 수전동은 수동으로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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