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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동숭동 대학로 서울대병원 건너편쪽이다. 동숭동은 1914년 4월 1일 경성부의 동명제정 때 숭교방 동쪽에 있는 동이라 하여 동숭동이 동명이 유래되었다. 낙산 정상 부분부터 기슭 전체를 차지하는 동숭동은 일찍부터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았고, 성문(城門) 가까이 있는 도성(都城)안 마을인데다가 성균관(成均館)과 창경궁·배오개시장이 머지않은 곳에 있어 부락의 부락의 형성 여건이 좋았다. 따라서 현재까지 여러 개의 자연부락 이름이 남아 전한다. 남상문은 낙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선조 때 군수 남상문(南尙文)이 살았다. 명나라 사신 양호(楊鎬)가 낙산에서 놀다가 내려다 보니 마을 한가운데에 정원·연못·나무의 조화가 이루어진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단숨에 뛰어내려가 아름답게 정원을 가꾼 주인의 뛰어난 기..
21. 돈의동 종로3가역에서 옛 피카디리 옆쪽 지역이다. 돈의동의 동명이 유래된 돈녕부지(敦寧府址)를 오늘날에 정확하게 고증할 수는 없지만 1914년의 동리명 제정시 신설된 돈의동 구역 대부분이 고종 때 돈녕계 돈녕동과 어의동계에 속하였던 것을 미루어 보아 적어도 영조 이래 돈녕부상계, 돈녕부하계의 영역 안에 들어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일설에 의하면 돈녕부가 익선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돈의동과 익선동의 경계부근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돈의동을 이룬 부락으로는 교동, 누동, 명주전골, 어의동, 장대장동, 한동 등인데 교동은 향교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향교동, 향골이라고도 한다. 명주전골은 한자로 옮기면 주동(紬洞)이 되는데 종로3가·낙원동·돈의동에 걸쳐잇는 마을로 명주전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어의..
20. 도렴동 세종문화회관 뒷편이다. 도렴동은 조선초기에 도렴서(都染署)라는 관아가 있었다고 하여 이름한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처음 도렴서를 설치한 것은 태조 원년(1392)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아직도 고려왕조의 옛도읍 개성에 있을 때의 일이요, 이곳 지금 도렴동에 도렴서가 설치되었던 것은 태조 3년에 한양천도가 실현되고 이듬해에 경복궁이 준공된 다음 즉 태조 4·5년경의 일일 것으로 보여진다. 「동국여지비고」권1 혁파공서조(革罷公署條)를 보면, 도렴서라는 관아는 조선에서 창설한 것이 아니요, 이미 고려왕조 때부터 있던 관제를 그대로 인존(因尊)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도렴서는 그 관부명이 표시하는 것처럼 주로 궁중진헌용 직조물의 염색을 맡았던 관청으로서, 고려의 제11대 문종 때에 정8품의 영1인, 정9품..
19. 당주동 세종문화회관 뒷쪽 먹자골목 쪽이다. 당주동은 1914년 4월 경성부제 실시하면서 서울의 동리를 폐합 조정할 때에 종래의 봉상사전(奉常司前), 내섬동(內贍洞), 남문동(南門洞), 창례동(昌禮洞), 북문동(北門洞), 대창동(大昌洞), 훈조동(燻造洞), 야주현(夜珠峴), 당피동(唐皮洞)의 각 일부를 합한 동인데 종래의 동명 중 당피동의 「당」자와 야주현의 「주」자를 따서 붙인 동명이다. 당주동을 이룬 여러 개의 자연부락의 유래를 보면 내섬시가 있어 붙여진 내섬동은 내섬삿골이라고도 하며, 봉상사 앞에 있는 마을은 봉상사전동 혹은 봉상사 앞골이라 했다. 남문동은 봉상사의 남문이 있으므로 붙여진 동명으로 남문골이라 했고, 북문이 있는 곳을 북문골 혹은 북문동이라 하며 내수동과의 경계에 걸쳐 있다. 대창동과 훈조동에..
18. 누하동 배화여자대학교부터 통인시장 사이, 누상동 아래의 지역이다. 누하동은 남척동(南隻洞), 송목동(松木洞), 장성동(長成洞), 오거리(五巨里), 유목동(柳木洞), 누각동(樓閣洞) 일부를 합쳐 누각동 아랫쪽에 있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후기 이래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동이다. 이 가운데 누하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누각동의 지명은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표시되어 있다. 누각은 연산군 때 지었던 정자가 아니고 광해군(光海軍) 때 건축한 인경궁(仁慶宮)으로 증·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됨에 따라 이후 빈집으로 두자 황폐되어 빗물이 새는 누각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누각골에 사는 사람들도 양반 사대부가(士大夫家)가 아닌 ..
17. 누상동 서촌마을에서 수성동 계곡 옆쪽 마을이다. 누상동은 1914년 4월 1일 경성부(京城府)의 동명을 새로 제정 실시함에 따라 누각동의 위치한 북부 순화방의 누각동(樓閣洞)의 일부를 누상동이라 하였다. 고종 초 편찬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각동은 인왕산 아래에 있고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지금은 여항(閭巷)의 서리노퇴자(胥吏老退者)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화과업(花果業)에 종사하는 자가 많다. 누각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된 타당성은 인정하나 과연 연산군 때 누각을 지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시 된다. 여기서 누각이라 함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건물이 될만큼 규모가 큰 누각 건물로 민가의 것이라기 보다 궁궐과 관련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
16. 내자동 경복궁역, 서울지방경찰청, 세종마을 먹자골목을 아우르는 동네이다. 내자동의 동명이 유래된 내자사(內資寺)는 호조(戶曹)소속 관서이다. 고려 때부터 있어왔던 의성고(義成庫)를 태종 3년(1403)에 내자시로 고쳤는데 궁내에 미(米), 면(麵), 주(酒), 장(醬), 유(油), 견(絹), 소(蔬), 과(果), 내연(內宴), 직조(織造)등의 공급을 담당하였다. 『고려사』에는 내자시나 의성고가 보이지 않는 대신 내방고(內房庫)가 있다. 충선왕(忠宣王) 원년(1309)에 운진창(雲臻倉)을 부흥창(富興倉)에 합하고 의성창(義成倉)으로 개칭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에는 내방고로 고쳤다. 여기에 보이는 의성창 또는 내방고가 내자시의 전신인 의성고와 같은 관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자시의 위치에 대하여는 『동국여지..
15. 내수동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경복궁역 사이의 동네이다. 내수동의 동명은 옛날 내수사(內需司)라는 관청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14년에 동명을 개정할 때에는 영빈동(英嬪洞), 누정동(樓井洞), 승전교(承傳橋), 내수사전동(內需司前洞), 내수사와 사직동(社稷洞), 박정동(朴井洞), 종교(宗橋), 대창동(大昌洞), 북문동(北門洞)의 각 일부를 합하여 수창동(需昌洞)으로 이름하였다가 뒤에 내수동으로 고쳤다. 옛날에는 이곳이 서부 인달방(仁達坊) 관내에 속하였다. 내수사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궁내에서 쓰는 미곡, 포백(布帛), 잡물과 노비 등의 수요를 공급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다. 궁중의 수용(需用)도 물론 정상적인 경용(經用)은 호조나 탁지부에서 공급하였던 만큼, 본사(本司)에서 공급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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