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3가역에서 옛 피카디리 옆쪽 지역이다.
돈의동의 동명이 유래된 돈녕부지(敦寧府址)를 오늘날에 정확하게 고증할 수는 없지만 1914년의 동리명 제정시 신설된 돈의동 구역 대부분이 고종 때 돈녕계 돈녕동과 어의동계에 속하였던 것을 미루어 보아 적어도 영조 이래 돈녕부상계, 돈녕부하계의 영역 안에 들어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일설에 의하면 돈녕부가 익선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돈의동과 익선동의 경계부근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돈의동을 이룬 부락으로는 교동, 누동, 명주전골, 어의동, 장대장동, 한동 등인데 교동은 향교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향교동, 향골이라고도 한다.
명주전골은 한자로 옮기면 주동(紬洞)이 되는데 종로3가·낙원동·돈의동에 걸쳐잇는 마을로 명주전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어의동(於義洞)은 어의궁이 있으므로 붙여졌고 한동은 한양동·한양골이라고도 부르고 누동은 다락골·다락우물골이라고도 한다. 장대장동은 영조 때 장군을 지낸 장붕익(張鵬翼?∼1735)과 그의 아들 태소(泰紹), 손자 지항(志恒)·지풍(志豊)과 증손자 현택(鉉宅)이 지금의 피카디리 극장 뒤편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숙종이 홍봉한(洪鳳漢)에게 무숙공 장붕익이 어느곳에 사느냐고 묻자 홍봉한은 「사람들이 이항복(李恒福)을 어성대감(禦城大監)이라 부르듯 무숙공은 장대장이라 부른다」라고 아뢰었고 이에 숙종은 포도청 맞은 편 장붕익이 사는 곳을 장대장동이라 부르라는 명을 내리면서부터 유래가 시작된다.
또한 돈의동에는 의리가 두터운 채씨 형제가 살았기 때문에 동명 유래가 비롯된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서울에 살던 채제민(蔡濟民)이라는 젊은이가 평양으로 가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여 돌아올 노자마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숙소로 묵고 있던 주인집 딸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눈치챈 집주인은 채제민이 서울의 양반이란 점에 끌려 데릴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결혼 후 채제민이 하는 일 없이 매일 빈둥빈둥 지내자 장인은 그를 미워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을 때 후일 명재상으로 알려진 채제공(蔡濟恭)이 평양감사로 부임해왔다.
채제민의 장인은 감사와 사위의 성이 같으므로 아마 일가라도 되나 보다하고 사위더러 "얘, 이번 감사가 채제공이란 분인데 너 아냐?"하고 물었다. 이에 채제민은 "안다 뿐입니까. 제 사촌형님인데..."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인은 깜짝 놀라면서도 사위를 내세우면 큰 이득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사위에게 "그럼 뵈러 가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전혀 본적도 없는 채제공감사를 안다고 큰소리를 친 채제민은 이 말에 "네, 뵈러 가야지요, 하지만 이꼴을 하고 서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의관도 준비하고 다른 인사치레도 준비를 해야 가지요"라며 옷을 만든다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채제민은 평양감사를 만나러 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급기야는 감사를 만나러가지 않을 수 없게된 채제민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관아 앞에 나아가 다짜고짜 울기 시작하였다. 관원들이 다가와 그 연유를 물었으나 감사를 직접 만나야만 대답을 하겠노라며 계속 대성통곡을 하였다. 문밖의 이러한 소란을 전해들은 평양감사는 채제민을 관아로 들게 하였다. 평양감사 앞에 앉은 채제민은 무조건 살려주십사하며 석고대죄를 하였는데 이에 당황한 감사는 "넌 어디서 온 누구인가?"라고 묻자 "서울에서 온 채제민입니다.""그래? 채제민이라 나하고 항렬이 같구나."하였다. 이말에 용기를 얻은 채제민은 우는 것을 그치고 "감사의 항렬과 이름이 같길래 정의 장인께 감사를 사촌형님이라 거짓말을 했으니 이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 목을 치십시오"라 하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평양감사는 "게 무슨 소리냐, 네가 너의 사촌형이 되면 될게 아니냐. 좋다, 객지에서 동생하나 얻어서 좋고 너도 형을 얻어서 좋고..."그리고 내아로 가더니만 자기 부인보고 "여보, 내 사촌동생이요"하고 인사시키고 그 아들들에게는 채제민을 아저씨라 인사시켰다. 그리고는 "얘, 늬 장인하고 같이 오너라. 그래야 여기 있는 동안 편할 것 아니냐"하니 채제민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뵙고 오느냐"하고 장인이 물으니 "네, 뵙고 옵니다. 감사께서 장인도 뵙자고 하니 빨리빨리 갑시다"하며 급히 음식과 선물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그랬더니 감사 채제공이 버선발로 뛰어 나오면서 "사돈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사를 하고는 "애가 집을 나간지가 오랜데 생사를 몰라서 걱정을 했더니 이렇게 따님과 결혼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다. 채제공이 평양감사 임기 동안은 채제민도 평양에서 잘 지내고 있다가 서울 내직으로 들어올 때 채제민도 따라왔다. 그리고는 지금 돈의동에다가 아랫채, 웃채 집을 짓고서는 웃채는 채제민이 살고, 아랫채는 채제공이 살아서 의를 두텁게 했다고 하여 돈의동으로 했다.
돈의동은 북으로 익선동, 동쪽은 묘동, 남쪽은 종로3가, 서쪽에 낙원동에 접한 전형적인 도심의 주택지구이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장봉익터
채제공집터
돈녕부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