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뒷쪽 먹자골목 쪽이다.
당주동은 1914년 4월 경성부제 실시하면서 서울의 동리를 폐합 조정할 때에 종래의 봉상사전(奉常司前), 내섬동(內贍洞), 남문동(南門洞), 창례동(昌禮洞), 북문동(北門洞), 대창동(大昌洞), 훈조동(燻造洞), 야주현(夜珠峴), 당피동(唐皮洞)의 각 일부를 합한 동인데 종래의 동명 중 당피동의 「당」자와 야주현의 「주」자를 따서 붙인 동명이다.
당주동을 이룬 여러 개의 자연부락의 유래를 보면 내섬시가 있어 붙여진 내섬동은 내섬삿골이라고도 하며, 봉상사 앞에 있는 마을은 봉상사전동 혹은 봉상사 앞골이라 했다. 남문동은 봉상사의 남문이 있으므로 붙여진 동명으로 남문골이라 했고, 북문이 있는 곳을 북문골 혹은 북문동이라 하며 내수동과의 경계에 걸쳐 있다.
대창동과 훈조동에 걸쳐 있던 마을은 창례동, 봉사사의 대청이 있는 마을은 대청동 혹은 대청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서 대창동으로 되었으며, 대창골 아랫쪽에 있는 마을은 아래 대청골이라 불렀다. 또한 당주동과 신문로1가의 세문안교회터에 걸쳐 있던 마을은 훈조동이라 불렀는데 메주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며 메주가맛골이라고도 하였다.
당주동의 동명이 된 당피동 혹은 당핏골은 중국 의원 피씨가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야주현은 야주개로 불리워졌으며, 이 고개에 서면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현판이 명필이어서 밤에도 거리를 비치기 때문에 그 앞의 지명을 야조가(夜照街)라 하였고 야주현(夜晝峴)의 주(晝)가 같은 음의 주(珠)로 바뀌어졌다.
내수동과 당주동, 도렴동의 경계 부근에는 승전빗다리 혹은 승전교(承傳橋), 승전색교(承傳色橋)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승전빗아치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북악산 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청운동, 효자동을 거쳐 세종로 쪽으로 모여 들었던 조선시대의 당주동 풍경은 얕으막한 동산과 작은 개천들이 함께 어우러졌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당주동은 북으로 내수동, 동으로 도렴동, 남쪽은 신문로1가, 서쪽은 신문로2가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치 부채를 활짝 편 것과 같은 지형이다. 1970년대말부터 시작된 도심재개발 지역으로 비교적 일찍 정비가 시작된 까닭에 동의 동서와 남북간을 폭 10m 이상의 도로가 통과하고 있는 전형적인 도심의 구조형태를 이루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야주개
내섬시터
분봉상시터
봉상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