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마을에서 수성동 계곡 옆쪽 마을이다.
누상동은 1914년 4월 1일 경성부(京城府)의 동명을 새로 제정 실시함에 따라 누각동의 위치한 북부 순화방의 누각동(樓閣洞)의 일부를 누상동이라 하였다. 고종 초 편찬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각동은 인왕산 아래에 있고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지금은 여항(閭巷)의 서리노퇴자(胥吏老退者)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화과업(花果業)에 종사하는 자가 많다.
누각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된 타당성은 인정하나 과연 연산군 때 누각을 지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시 된다. 여기서 누각이라 함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건물이 될만큼 규모가 큰 누각 건물로 민가의 것이라기 보다 궁궐과 관련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연산군 때 과연 누각동 일대에 그러한 건축을 영건(營建)한 사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직염국으로 개편하기도 하였지만 충선왕 2년(1310)에 다시 도렴서로 복원하여 말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고려시대의 직제, 임무 등을 그대로 계승하여 한양천도 후에 도렴서를 궁궐에서 가까운 이곳에 설치하였고, 70여년은 지나서 세조 6년(1460)에는 중부수진방(壽進坊)에 있는 제용감(濟用監)에 병합되었다.
1914년 동리구역을 조정 개편할 때에는 도렴서가 있는 일대의 마을인 도렴동, 공조(工曺)의 뒤가 되므로 붙여진 공후동(工後洞) 혹은 공조뒷골, 적선동 170번지에 궁중에서 필요한 술과 감주를 공급하는 관아가 있었고, 그 주변의 부락은 사온동(司 洞) 혹은 사온섯골, 의영고가 있던 주변의 마을은 의영곳골 혹은 의영동(義盈洞)의 구역을 합하여 도렴동을 신설하여 지금에 이른다.
현재의 도렴동은 북으로 내자동길을 경계로 하여 적선동과 남으로는 당주동, 서쪽으로 내수동, 동쪽은 세종로로 둘러싸인 삼각형 모양의 지형이다. 동(洞) 면적의 60%이상이 세종문화회관의 주차장과 경희궁 시민공원 등으로 되어 있고 실제 생활주거 면적은 30% 정도밖에 안된다. 도렴동 45번지에는 교통방송국이 위치해 있다. 연산군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이궁(離宮)등의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창의문(彰義門) 밖의 장의사(藏義寺)터에 세웠던 이궁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세운 이궁 두모포(豆毛浦)이궁 등이 대체로 서울에 세운 연산군 때의 이궁으로 세 곳 이외의 이궁은 나타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누각동에 누각을 세운 시기가 연산조였다고 함은 잘못 전해진 기록이며 광해군(光海君)때 조성한 누각동 일대에 소재했던 인경궁(仁慶宮)이 아닌가 한다.
인경궁은 광해군 9년부터 15년까지 역사(役事)를 계속하여서 그동안에 외전(外殿)·내전(內殿)·별실(別室) 등의 주요건물을 영조하였으나 궁궐로서의 제반시설을 채 완공하지 못한 가운데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건축을 중단한 궁궐이다.
광해군이 인경궁을 건립하게 된 배경은 승려 성지(性智)의 권유에 의하였다. 인왕산은 석산이 튀어나온 데다가 인왕이라는 두 글자가 길하므로 그 아래 왕궁을 세워 왕자가 거처하면 역수(曆數)가 가연(可延)하고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에 따라 건축되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고 이복아우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유배, 마침내 죽게 만드는 등 패륜정치를 일삼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자 인경궁은 빈집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인조11년에는 인경궁의 일부를 철거하여 목재와 기와를 창경궁의 내전 조성에 사용하였고 나머지 전각들은 효종 때까지 존치되었다가 숙종, 영조 년간에 건물들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民家)가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약 200년 동안 존속된 인경궁의 위치는 현재의 필운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일대로 인조11년에 일부 전각이 철거되고 나머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곳이 누각동 일대였다. 『동국여지비고』에서 말하는 누각동은 곧 인조이후 남아있던 인경궁의 전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연산군때 누각동에 궁궐을 영조한 일은 전혀 없으며 그 이후에도 그런 사실이 없다. 더구나 인경궁은 건립한 후 왕이 거처한 일없이 폐기되었던 것과 완성되지 못한 채 일부 철거된 '폐기된 궁궐'이어서 궁이라고 지적하지 않고 누각이라고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동국여지비고』에 「누각동은 연산군 때 세운 누각이 있어 그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은 오전(誤傳)이며, 광해군 때 세운 인경궁의 누각이 있어서 동명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누각동이란 지명은 인경궁이 이룩된 광해군이후에 생성된 지명이었으며 일제 초까지 사용되다가 없어진 동명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누상동은 북으로 옥인동, 동으로 누하동, 남으로 필운동, 사직동, 무악동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서대문구 홍제동에 이웃한 전체면적의 2/3가 산지(山地)로 형성된 곳으로 동의 동북쪽에 비교적 오밀조밀하게 주택지가 밀집하여 형성된 누상동은 동명이 연유되는데 영조때 만든「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누각동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누상동을 통과하는 가로는 인왕산길 하나뿐인데 인왕산길은 사직동에서 누상동, 옥인동을 거쳐 청운동의 창의문까지의 폭 12~15m, 연장2,300m가로(街路)이다.
누상동은 186번지에 인왕산정 노인정, 184번지에 옥인유아원, 50번지에 누상유아원이 위치하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한양성곽
백련바위, 뜬 바위, 부처바위, 범바위, 매바위
인왕산
윤동주 하숙집
백호정 약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