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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낙원동 탑골공원 뒷쪽 음식점이 많은 쪽이고 익선동과 접하고 있다. 낙원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제정에 따라 이전 중부 경행방 교동, 탑동, 어의동, 주동의 각 일부와 정선방의 한동과 관인방의 원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시내 중앙의 낙원지라 할 만한 탑골공원이 있으므로 낙원동이라는 동명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낙원동은 서울의 북촌(北村)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과 관련이 깊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서울의 중심 지역으로 되어 온 곳이기도 한다. 교동(校洞)은 경운동과 인접지역인데 낙원동 280번지에 향교(鄕校)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향교동 혹은 향곳골이라고도 하며 낙원동 271~283번지 일대이다. 원동(園洞)은 인사동과 낙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원골이라고도 부른다. 탑동(塔洞)은 탑골이라고..
13. 권농동 종묘와 익선동 사이의 길이다. 권농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 곳에 있던 채소재배를 권장하는 농포서(農圃署)의 이름을 따서 권농동이라 하였다. 권농동은 농포동, 마동, 수문동, 숭문동이 모여서 이루어진 동명인 만큼 농사와 관련이 깊다. 농포동은 돈화문 밖 동쪽에 궁중에서 필요한 내농포(內農圃)가 있어서 붙여진 동명인데 농포안이라고도 하고 농파니라고도 불렀다. 지금 창덕공원으로 조성된 일대가 농포안이었다. 마동(麻洞)은 마전골 혹은 마전동(麻田洞)이라고도 하는데 와룡동, 봉익동, 권농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대략 권농동 185~190번지 일대가 된다. 창덕궁에서 흘러내린 물이 종묘전교(宗廟前橋)와 파자교(把子橋) 사이로 들어가므로 냇가의 폭이 넓고 반석도 많았다. 이 때문에 빨래터로 최적..
12. 궁정동 청운동 주민센터에서 청와대쪽 동네이다.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많이 알려진 동 이름이다. 궁정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북부 순화방의 육상궁동, 동곡, 온정동, 신교, 박정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육상궁의 「궁」자와 온정동, 박정동의 「정」자를 따서 궁정동이라 하였다. 궁정동의 동명과 함께 지금도 고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육상궁(毓祥宮)의 건물이다. 지금 청와대 서쪽, 바로 북악밑에 자리잡은 육상궁은 처음 영조가 그의 생모인 최씨를 위하여 세웠던 사묘(祠廟)였다. 궁정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동골은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육상궁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동곡(東谷)이라고도 한다. 박우물골은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박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
11. 구기동 상명대 동북쪽 북한산이 있는 지역이 구기동이다. 구기동은 구텃굴이라는 동명을 한자로 옮긴데서 유래된다. 조선시대 한성부 상평방(常平坊)내 구텃굴이었다가 일제 때 이르러 1914년 4월 1일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서 세곡(細谷)을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하였으며, 광복후 1949년 8월 13일에는 다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구기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5년 4월 18일에 서울특별시 동제실시에 의하여 구기동은 법정동인 평창동과 함께 행정구역명인 평창동에 속하여 되었는데 1975년 10월 1일 종로구로 편입되었다. 구텃굴은 무엇에 대한 구터인지 그 연원을 확인할 수 없지만 구기동을 이루고 있는 자연촌락 가운데서 "구터"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구기동의 자연촌락으로는 가늘굴·먹정굴..
1-10. 종로구> 교북동 교남동의 북쪽으로 독립문까지 이어져 있다. 영천시장 건너편이다.교북동은 교남동과 연접된 지점인 곳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는 북쪽 동네라 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곧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로 교남파출소 앞에 석교(石橋)가 있어 다리의 북쪽을 교북동 남쪽을 교남동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교북동에는 영은문(迎恩門)과 독립문(獨立門), 모화관(慕華館)을 헐고 새로 세운 독립관(獨立館)이 있었다. 태종 7년(1407) 8월에 창건한 모화관은 영천동 69번지에 있었으므로 모화관의 앞에 위치한 영천동과 교북동에 걸쳐있는 마을을 관앞골 혹은 관전동(館前洞)이라 하였다. 교남동과 접한 78번지 부근일대에는 돌다리가 있었으므로 석교동 혹은 돌다리골·석다릿골이라 하였다. 교북동 11번지 일대는 교북동·행촌동·홍파동에 걸쳐..
1-9. 종로구> 교남동 서대문사거리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 현재는 경희궁 자이 앞쪽 상가가 있는 곳이다.교남동의 동명은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 북쪽, 곧 교남파출소 앞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다 하여 다리의 남쪽 동네를 교남동, 북쪽을 교북동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교남동의 동명 유래가 되고 있는 석교(石橋)는 1830년에 유본예(柳本藝)가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석교, 1864년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대동지지(大同地志)」에는 초교(草橋), 고종 초에 김정호가 만든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교량의 표시만 되어 있고 1902년 로얄 아시아틱소사이어티에서 간행한 「서울지도」에는 석교라고 표시되어 있다. 또 다리의 이름을 돌다리, 석다리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아 「수선전도」제작 당시에는 이미 석교였던 것으로 ..
1-8. 종로구> 관훈동 흔히 인사동 골목이라고 하는 곳이 관훈동이다.관훈동은 1914년 4월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관인방(寬仁坊)의 대사동(大寺洞), 청석동(靑石洞)의 각 일부와 훈동(勳洞)을 병합하여 방명이었던 관인방의 「관」자와 훈동의 「훈」자를 따서 관훈동이라 하였다. 1914년 관훈동의 관할구역이 된 대사동 지역은 인사동과 관훈동에 걸쳐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탑골공원 자리에 큰 절인 원각사(圓覺寺)가 있어 댓절골, 또는 한자명으로 대사동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함께 편입된 청석동(靑石洞)은 지금의 관훈동과 견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살고 있어서 청성동(淸城洞), 청성골이라 하였던 것이 변하여 청석골로 되었다.영조 27년(1751) 도성의 방어를 위해 주민자치 조직을 편..
7. 관철동 종각역에서 피아노 거리를 아우르는 블록으로 번화가를 말할 때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관철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중부 장통방의 청포후동, 혁전후동, 염동, 동곡, 입동의 각 일부와 장교동, 관자동, 정자동을 병합하여 관자동(貫子洞)의 「관」자와 철물교(鐵物橋) 「철」자를 합하여 관철동이라 하였다. 관철동의 동명을 가져오게 한 관자동(貫子洞)은 금·옥·뿔·뼈로 망건 당줄을 꿰는 고리인 관자를 파는 전이 있어 관잣골 또는 한자명으로 관자동이라 하였다. 또 철물교(鐵物橋)는 종로2가 30번지 동남쪽에 있던 다리로 계동, 재동 방면의 물이 관훈동, 인사동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서 장통교(長通橋) 아래로 흘러 들어가는 중간으로 지금의 종로2가를 건너는 다리인데 통운교(通雲橋)라고도 하였다.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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