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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송현동 인사동길 건너편, 예전 풍문여고가 있던 지역이다. 송현동은 솔고래(松峴)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송현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송현은 솔고개솔재라고도 부르는데 지금의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미대사관저 사이에 있던 고개로 소나우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므로 송현이라 불렀다. 이에 대하여는 『태조실록(太祖實錄)』7년 4월 임진조(壬辰條)에도 「경복궁 좌강(左岡)의 송(松)이 고(枯)하여서 근강인가를 철할 것을 명하였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경복궁 좌강'이란 송현과 그 내맥(來脈)의 소나우가 고고(枯槁)하므로 근처의 인가를 철거케 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곳에는 조선 초 무렵에 송목이 많았고 그 송목은 국가에서 보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송목의 보호는 물론 산맥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였을 것이다..
37. 송월동 서대문의 경희궁자이아파트 중 일부이다. 송월동은 송정동(松亭洞)의 「송」과 월암동(月岩洞)의 「월」자를 따서 송월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송월동은 조선시대 반송방(盤松坊)의 관할 하에 있었으므로 특별히 소나무와 관련을 많이 갖고 있는 동이다. 실제 교남동의 동쪽 개천변에는 소나무가 가지런하게 심어져 있어 이곳의 운치를 따라올 만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복개되어 있으므로 길인지 개천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곳 개천변에 있는 동네를 개천께 혹은 천변동이라 하였으며 특히 흰소나무가 정자처럼 서 있는 곳을 송정동이라 하며 소나무 아래에는 물맛이 매우 좋은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기상청(송월동 1번지) 부근에는 마치 보름달처럼 둥글게 생긴 큰 바위가 있으므로 월암(月岩) 혹은 위령바위라 하였고..
36. 소격동 경복궁 동편과 삼청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동네이다. 서태지 노래 중에도 소격동이라는 노래가 있다. 소격동의 동명은 삼청전(三淸殿)의 삼청성진(三淸星辰)의 제사를 지내는 소격서(昭格署)가 있었다하여 유래되었다. 소격동은 소격서가 있던 곳인데 일설에는 화동24번지라고 하나 오히려 소격동 24번지가 맞다. 이는 소격서가 삼청전의 제사를 주관하였던 관청인 만큼 삼청전 입구에 있어야 했고 지금의 삼청동길이 원래 개천이었던 데다가 이 근방에 소격서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증명된다. 더구나 소격동의 이전 명칭이 오래전부터 소격서동(昭格署洞)이었고 삼청동의 동명 역시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도가류(道家類)의 수도·기도의 전당인 삼청전은 산수가 깨끗하고 수려하여 동곡(洞谷)이 깊은 곳에 있었지만, 정부에..
35. 세종로 광화문 중심거리이다. 세종로는 우리나라의 정치중심지로 역대 제왕중 업적이 가장 뛰어난 세종대왕의 정치를 본받으라는 뜻에서 그 묘호(廟號)를 따서 붙여진 동명이다. 세종로는 비각에서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광화문까지의 구간으로서 광화문통이라 부르던 것을 1946년에 개명한 것이다. 이 거리를 세종로로 변경했던 것은 그것이 옛날의 왕궁인 경복궁의 앞거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이 거리는 세종대왕의 탄생지인 준수방(俊秀坊)에서 멀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세종로동은 조선시대 옛 지명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그에 관계되는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세종로와 도렴동이 이어지는 세종로 81-3번지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토목·건축·산림 및 하천관리를 담당했던 공조(工曹)가 있었으므로 그..
34. 서린동 종로1가 SK빌딩이 있는 블록이다. 서린동은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여 구획했던 행정구역 가운데 중부(中部) 8방(坊)의 하나인 서린방(瑞麟坊)의 방명을 그대로 동명으로 한 것이다. 서린동을 형성하던 옛지명 가운데 낭후(廊後)·사기전동(砂器廛洞)·주전동(紬廛洞)·백목전동(白木廛洞)·합동(蛤洞)등 시전과 직접 관련을 가진 것이 많다. 도성안의 시전(市廛)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커서 행세를 하였다는 육의전(六矣廛) 가운데 면포전(綿布廛)·목전(木廛)·지전(紙廛)·포전(布廛)·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이 서린방 내에 있었던 것도 상업이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는 도성의 중심지인 옛날 운종가의 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상업지인 동시에 주거지로서의 기능 수행도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서린동 일대에는..
33. 삼청동 경복궁 동편 뒷쪽이다. 삼청동의 동명은 도교(道敎)의 삼청전(三淸殿)이 있어서 유래되었다. 삼청동은 도성(都城)의 북쪽지구에 해당되면서 경복궁의 동북지역인데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그래서 사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는 뜻의 삼청(三淸)이 되었다. 삼청동은 옛날부터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계곡물이 흘러 내려 도심인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었으므로 바위나 다리, 우물, 골짜기 등에 얽힌 이야기와 이름도 많이 남아있다. 가까이 있을 때에는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떠나기가 싫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서 뛰어가 보고 싶은 것이 삼청동의 맑고 깨끗하고 그윽한 경치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명사(名士)들이 이곳을 찾아와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었는데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다음과 같은 시(詩..
32. 사직동 사직단 주변과 황학정 인근 지역이다. 사직동의 동명이 보이는 것은 퍽 오래 전부터의 일로서 영조 27년(1751) 9월에 왕이 성내 시민의 도성수호에 대한 절차 등을 윤음으로 반포하는 중에도 사직동계의 명칭이 보인다. 그리고 1914년 경성부제의 실시와 함께 동리간의 구역을 재조정할 때에는 옛 사직동의 일부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무덕문골 혹은 줄여서 무덕동이라는 마을로서 무덕문은 사직동에서 신문로 2가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던 것으로 경희궁의 북문이었다. 그리고 사직동과 내수동에 걸쳐 박우물이 있다하여 박우물골 또는 박정동(朴井洞)이라는 마을과 도정궁(都正宮) 앞 등 너머에는 너멍골이, 사직동 서쪽에는 창평동(昌平洞)을 합하여 사직동으로 하였는데, 동명은 사직단(社稷壇)이 있음으로 해서..
31. 사간동 경복궁 동십자각 뒷편 지역이다. 중학동 북동쪽 경복궁담의 동쪽 일대를 옛날부터 간동(諫洞) 또는 사간동으로 불러 오는데, 그것은 이곳 경복궁 건춘문(建春門)의 길 건너편에 사간원이라는 관청이 있었던데에 연유한 것이다. 한말까지 중학동(中學洞), 송현(松峴), 벽동(碧洞), 간동(諫洞)이 모두 관광방(觀光方) 중학계(中學契) 안에 있었는데 1914년 부제 실시 때 옛 간동에 다시 벽동의 일부를 포함하여 사간동으로 개편하였다. 사간동의 동명유래가 된 사간원은 왕에 대한 충고기관으로 왕의 과실이나 여러 정령(政令)의 득실에 대해 간쟁(諫諍), 논박(論駁)하는 일을 맡았다. 사간동은 사간원이 있던 간동과 송현동, 중학동, 사간동 사이에 걸쳐 형성된 벽동으로 이루어졌다. 벽동은 다락골 혹은 벽장골이라고도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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