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1가 SK빌딩이 있는 블록이다.
서린동은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여 구획했던 행정구역 가운데 중부(中部) 8방(坊)의 하나인 서린방(瑞麟坊)의 방명을 그대로 동명으로 한 것이다. 서린동을 형성하던 옛지명 가운데 낭후(廊後)·사기전동(砂器廛洞)·주전동(紬廛洞)·백목전동(白木廛洞)·합동(蛤洞)등 시전과 직접 관련을 가진 것이 많다. 도성안의 시전(市廛)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커서 행세를 하였다는 육의전(六矣廛) 가운데 면포전(綿布廛)·목전(木廛)·지전(紙廛)·포전(布廛)·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이 서린방 내에 있었던 것도 상업이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는 도성의 중심지인 옛날 운종가의 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상업지인 동시에 주거지로서의 기능 수행도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서린동 일대에는 옛날부터 많은 시정인(市井人)들이 거주하여 궁핍하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였고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쳐서는 기생들의 입주가 많아 기생촌으로 알려져 있으며 무교동(武橋洞)과 함께 음식환락가를 이루며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서린동에는 예전부터 여러 개의 마을이 있는데 행랑뒷골이라는 낭후동(廊後洞)이 있으며 주석전이 있어서 이름이 붙은 주석전골·두석동이 있고 마을 모양이 방망이와 같다고 하여 방망잇골이라는 추동(椎洞)이 있다. 사기전이 있었던 사기전골이 있어 사기전동 또는 사기동이라 하였고, 서린동과 남대문로1가에 걸쳐 백목전(白木廛)이 있었던 백목전동(白木廛洞)이 있으며 전옥(典獄)이 있으므로 해서 전옥동(典獄洞)·전옥골, 그 뒤쪽은 전옥훗골·전옥후동(典獄後洞)이라고 하였다. 황토(黃土)마루를 깎아내려 세종로와 연결되는 큰 길이 생기자 그 인근에 마을이 생겨났다. 이 마을은 새로 만든 길가에 생겼다 하여 신작로동(新作路洞)이라 하였다.
특히 광화문 우체국 동쪽에는 혜정교(惠政橋)가 있었는데 그 서쪽에는 세종 때부터 해의 그림자를 보아 시각을 아는 앙부일귀(仰釜日晷)를 두었으므로 그 부근의 마을인 신작로동(新作路洞), 송교(松橋), 혜천(惠泉), 피마동(避馬洞), 낭후동(廊後洞)을 합하여 앙부일귀의 뜻을 딴 일영대계(日影臺契)라 하였다. 앙부일귀대는 1970년 지하철 1호선 공사로 탑골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서린동과 남대문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은 장자우물이 있으므로 장자우물골 또는 부정동(富井洞)이라 하였으며 종로1가쪽의 서린동은 조개전이 있었으므로 합동 혹은 조개전골이라 하였다. 이 조개전골 뒤에는 담장이 붙어서 이어져 있으므로 병풍을 친 곳과 같다 해서 허병(許屛)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혜정교 근처 우물 주변의 마을은 혜천동(惠泉洞)·혜전골·혜전교우물골이라 하였다. 서린동 146번지에는 길가에 박고사우물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고사를 지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근처 사람들이 해마다 고사를 지낼 때면 온 마을이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박우물이라고도 하던 이 우물 아래쪽 서린동 96번지는 안고사우물 또는 줄여서 안우물이라 불렀는데 박우물과 달리 집 안에 있었으며 박우물처럼 고사를 지내면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서린동은 북으로 종로를 사이에 두고 종로1가와, 동쪽은 우정국로를 사이로 하여 관철동과 남쪽은 청계천로를 경계로 다동·무교동과, 서쪽은 세종로를 경계로 하여 신문로1가에 싸여있다. 종로와 청계천 사이에 길게 형성된 서린동의 현재 모습에서 주거지역을 찾기란 매우 힘들고 근래에 조성된 재개발사업으로 고층빌딩이 대부분 자리잡고 있거나 사업이 추진 중이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혜정교터
대광통교터
모교터
SK서린빌딩
영풍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