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 주변과 황학정 인근 지역이다.
사직동의 동명이 보이는 것은 퍽 오래 전부터의 일로서 영조 27년(1751) 9월에 왕이 성내 시민의 도성수호에 대한 절차 등을 윤음으로 반포하는 중에도 사직동계의 명칭이 보인다. 그리고 1914년 경성부제의 실시와 함께 동리간의 구역을 재조정할 때에는 옛 사직동의 일부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무덕문골 혹은 줄여서 무덕동이라는 마을로서 무덕문은 사직동에서 신문로 2가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던 것으로 경희궁의 북문이었다. 그리고 사직동과 내수동에 걸쳐 박우물이 있다하여 박우물골 또는 박정동(朴井洞)이라는 마을과 도정궁(都正宮) 앞 등 너머에는 너멍골이, 사직동 서쪽에는 창평동(昌平洞)을 합하여 사직동으로 하였는데, 동명은 사직단(社稷壇)이 있음으로 해서 유래되었다.
사직동 동명 유래가 되는 사직단은 사직동 1 -28에 위치한다. 원래 사직의 연원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사(社)는 토신(土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의미한 것인데 토신은 곧 국토를 주재하여 관리하는 신으로, 곡신은 농작의 풍흉(豊凶)을 좌우하는 신이라 보았던 만큼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던 고대 농본(農本)국가에서는 왕신의 조선(祖先)을 모신 종묘와 함께 가장 중시하던 시설이었다. 따라서 근대에 와서는 국왕이나 대신은 종묘사직과 사생(死生), 존망(存亡)을 같이 할 의무를 느끼기도 하였으며 또 사직은 국가를 의미하는 말로 쓰기까지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에 사직단이 처음 설치되어 그 제사(祭祀)가 국가 사전(祀典)에 의하여 거행되었고 고려 때는 성종 10년부터 왕의 교지(敎旨)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뒤이어 사직단의 제사의식 등이 상정되고 국가에서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왕이 사직단에 나아가서 직접 제사를 드렸다.
한편 조선에서는 태조 2년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종묘는 당시 왕궁인 경복궁의 동쪽인 동부 연화방에 두고 사직은 왕궁의 서쪽인 서부 인달방 즉 지금의 사직공원 안에 설치하였는에 태조 4년(1395)에 조영되었으며 단이 완성되자 주변에 동서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안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은 1907년 7월 이후부터 제사가 폐지되면서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공원에는 신사임당(1970년 10월 14일 건립), 이율곡(1969년 8월 8일 건립)의 동상과 김동인문학비(1976년 10월 건립)와 공원안 언덕쪽에는 시립종로도서관이 있고 사직동 1 - 48번지에는 국내유일의 어린이 전용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황학정 근처에는 사직노인정이 외로운 노인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사직동은 북으로 누상동, 필운동이 서쪽은 무악동, 행촌동 남쪽은 홍파동, 송월동, 신문로2가와 동쪽에 내수동, 내자동이 둘러싸고 있다. 인왕산의 정상에서 동쪽과 남쪽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그 산록에 자리잡은 사직동은 공원지구와 주택단지가 어우러져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는 사직동은 행정관할 면적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사직단
단군성전
황학정
인왕사 바위
안향청터
도정궁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