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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1. 종로구

29. 봉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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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3가역과 종묘 사이의 동네이다.

봉익동은 종묘와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태묘(太廟)·대묘(大廟)라고도 부르는 종묘(宗廟)와 담을 같이 하므로 일대의 동네를 대묘동·대묘골이라 하였고 종묘 앞으로 흐르는 큰 개울가의 넓은 반석은 빨래를 하는 마전으로 이용되었으므로 마전이 잇는 동이라 하여 마전동(麻田洞)이라 했는 데 줄여서 마동(麻洞)이 되었다. 대정동(大井洞)은 큰우물이 있으므로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봉익동의 「봉익」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 한성부 5부 52방과 갑오개혁 이후 5서(暑) 47방(坊)에 속한 동(洞)이나 계(契)의 이름에서도 이와 유사한 명칭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봉익이란 흔히 봉황새의 날개를 말하고 봉(鳳)은 임금을 뜻하기 때문에 봉자(鳳字)가 붙은 지명이라면 왕궁의 소재지나 제왕의 주거지를 연상하게 된다. 즉 종래 동양에서는 용(龍)과 봉(鳳)을 신령한 동물로 인정하고 비범한 인물을 「용봉지재(龍鳳之材)」라 하였으며, 제왕이 앉는 의자를 「용상(龍床)」, 제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봉궐(鳳闕)」이라고 하였다. 또 의자의 주변에 용모양의 장식을 하고, 궁궐 문 위에 봉황을 새겨 놓기도 하엿다. 뿐만 아니라 궁궐의 좌우협문을 「봉액(鳳腋)」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 「봉익」의 동명이 궁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종로3가 큰 길가에까지 나온 봉익동은 창덕궁과의 거리가 멀고 돈화문 앞에서 봉익동으로 나오는 중간에는 권농동·와룡동·익선동 등의 여러동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가까이 있는 종묘와 어떠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없다.

봉익동의 마동에는 조선초기부터 환관들이 많이 거주해 왔다.

환관이라 하면 성불구자인 남자로 오히려 육체적인 결함 때문에 궁녀들이 많은 궁중에 들어가서 시중을 들며 또 행세를 하기도 하던 이를테면 일종의 특수층 사람들이다. 환관이 이러한 특수한 지위에 있었던 만큼 그 친족이나 친지가 그들을 통하여 출세하기도 하였으며 출사(出仕)를 노리는 일부의 무리들은 이 환관들에게 간청하여 자기의 앞길을 열어 보려고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환관의 존재와 같이 높은 곳에 붙어서 행세하는 것을 「발봉익(發鳳翼) 곧 봉익의 날개에 붙어 다니는 물건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광무제기(光武帝紀)의 「용인부봉익(龍麟附鳳翼) 이성기소지이(以成其所志耳)」에 어원을 두는데 용의 비늘에 매달리고 봉의 날개에 붙어서 자기의 뜻을 이룬다는 말이다. 옛날 환관들의 존재야말로 용이나 봉익과 같은 궁중세력에 붙어서 자기 분수 이상의 호사와 세도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봉익동의 동명은 동중의 환관 세거(世居)의 사실을 의미하여 그렇게 제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환관은 남자 내관으로 일명 환자(宦者)·환시(宦侍)·내시(內侍) 등이라고도 하며, 그 기원은 중국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에 환수(宦竪)라는 기록이 보이며,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왕의 측근에서 많은 폐해와 물의를 자아내었다.

고려 초에는 대간(臺諫)의 직능에 통제력이 강하여 환관은 다만 궁중의 잡무를 담당하는 남반(南班) 7품의 제한된 지위만 가지고 있었으나 몽고의 지배에 따른 무질서한 왕권의 전제가 대두되자 차츰 그들의 지위가 향상되어 원종 때에는 국정에 참여하였고 충렬왕 이후에는 몽고에 갔던 환관이 사신으로 귀국하면서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행패가 심하여 내시부(內侍府)까지 설치되었다. 공민왕 5년(1356)에는 환관직을 고쳐 내상시(內常侍)·내시감(內侍監)·내승직(內承直)·내급사(內給事)·궁위승(宮?丞)·계관령(溪官令)·내담사(內擔事) 등을 두었다가 내시부를 설치하였다. 환관들은 점차 대간의 권한을 몰아내고 왕의 측근에서 권력을 잡아 정치에 간섭하는 한편 대토지를 소유하는 등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문란하게 하였다. 내시부는 우왕 때 폐지하였다가 공양왕 때에 다시 두었다.

환관은 본래 선천적이거나 또는 특수한 사정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거세된 자로서 천민계급에 많았으나 그들의 득세에 따라 왕의 옹호하에 권력과 부귀를 위하여 스스로 환관이 되는 이가 많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내시부를 두고 궁중내의 식사의 감독 명령의 전달, 대궐문의 수직(守直) 및 소제 임무 등 잡무와 염습(殮襲)·하광(下廣)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나 그 임용에 제한을 두어 일반 관직과 구별하고 단속을 엄히 하여 고려 때와 같은 큰 폐단은 없었다. 그러나 왕과 왕비 가까이 있으므로 이를 이용한 청탁이나 뇌물을 받아 부정한 재화를 쌓는 일은 불가피하였으나 명나라의 요구로 발탁되었던 환관이 귀국한 후에 부당한 요구를 강요하고 친척에게 축재를 시키는 일은 계속되었다. 환관도 처첩을 거느렸으며 그들에게는 이성(異姓)의 양자(養子)도 허락되었다.

조선시대 내시부의 정원은 140명으로 종2품의 상선(尙膳)이외에 상온(尙瑥)·상다(尙茶)·상락(尙樂)·상전(尙傳)·상책(尙冊) 등의 내시직명이 있으며, 영조 때는 내시를 가르치던 내시교관 2명이 있었으나 정조 때 폐지하고, 대전장번(大殿長番)·대전출입번(大殿出入番)·왕비전출입번·세자궁출입번·빈궁출입번을 두었다. 환관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철폐되었다.

아동문학가 어효선(魚孝善)은 봉익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봉익동에는 장씨성을 가진 사람이 경영하는 큰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는 동네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이 집에서는 큰 길가에 세물전(貰物廛)을 벌여놓았다. 세물전이란 혼인이나 장사 때에 쓰는 물건을 세를 받고 빌려주는 가게이다. 그때는 대개 혼인이나 환갑잔치도 집에서 했으므로 대청 마루 끝에 마루를 덧대어 넓히고 뜰에 차일을 치고 손님을 치렀다.

이 집에서는 새색시가 타는 꽃가마·꽃족도리·활옷·비녀·낭자·목기러기·촛대·병풍·돗자리와 같은 따위와 신랑의 사모관대·목화 따위와 교자상·대접·탕기·합·접시·목판 등 그릇을 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장사지낼 때는 송장을 상여에 실어 무덤까지 날랐다.

그 시대의 서울 사람들 가운데 이 집의 물건을 세내어 쓰지 않은 집은 거의 없었고, 이 집 양조장에서 만든 술을 안 사다 쓴 잔치도 없다고 할만큼 봉익동의 세물전은 장안에서 유명하였다.

이 세물전 건물은 함석 지붕을 덮은 이층집이었다.

이러한 봉익동은 6.25동란 직후에 한동안 적선구역(赤線區域)인 사창구역(私娼區域)이 되었으나 지금은 도시 재개발계획으로 인한 변화로 이러한 것들은 없어지고 도심지 속의 주택가를 이루고 있다.

봉익동은 북으로 권농동이, 동쪽으로는 훈정동, 남쪽으로는 종로3가, 서쪽은 묘동으로 둘러싸인 긴 사다리꼴 모양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묘동과 종로3가가 상가지대라면 봉익동은 비교적 대로변을 벗어난 주택지구에 해당되는데 종묘의 담장을 끼고 경계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공기가 맑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이동녕 주석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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