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흥국생명 건물부터 광화문역까지의 영역이다.
신문로1가의 동명은 서대문(西大門)의 속칭이 새문이므로 이를 한자로 옮겨 적은데서 유래된다. 신문로라는 지명은 길가 서쪽 언덕위에 도성(都成)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서대문은 원명이 돈의문이었으며, 또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됨에 따라서 서전문(西箭門), 신문(新門), 새문으로도 불렸다. 1914년 서대문정이 형성되기 전에도 이 부근에는 신문내라는 동리가 있었으며, 그 곳을 새문안 그 지역내에 있는 교회를 새문안교회로 부르는 것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문로1가는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번잡한 곳에 속하였다. 따라서 여러부락이 합쳐져서 신문로1가를 형성하였는데 세종로와 신문로1가에 걸쳐있는 마을을 동령동(東嶺洞) 혹은 동령골이라 했는데 동쪽에 황토마루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광화문빌딩(舊 국제극장)일대가 해당된다.
원동(園洞)은 동산(東山) 혹은 동산말이라고 하는데 동령동에서 이어지는 곳으로 얕으막한 함춘원(含春苑)의 동산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비변삿골은 신문로2가 59번지에 비변사가 있었기 때문이며 새문안길을 따라 구세군회관이 있는 곳까지였다.
신문로1가 169번지에는 선공감(繕工監)이 있었으므로 주변의 부락을 선공동 혹은 선공감골이라 하였고 43번지 일대는 염정동(廉井洞) 혹은 염정골·염정수골이라 불렀는데 철종의 가짜 외숙 염정수(廉井洙)가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새방골은 전 세종로 동사무소가 있던 일대로 관기(官妓)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방골·하방교 또는 아랫방골이라 부르는 곳은 신문로1가와 세종로에 걸쳐있는 마을인데 「수선전도(首善全圖)」와 「서울지도」에 교량 표시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희궁에서 가까운 순서로 하방교(下芳橋)·중방교(中芳橋)·상방교(上芳橋)로 생각되며 다리의 부근 부락을 아랫방골·중방골·웃방골이라 하였다.
동산말 동쪽에는 우물이 있다 해서 우물골 혹은 정동(井洞)이라 불렀으며 염정숫골 서쪽의 마을은 창림정동(昌林井洞)으로 불렀다. 당주동과 이어지는 세종문화회관 사잇길을 야주개·야주현 혹은 애주갯골로, 새문안길 남쪽으로 신문로1가와 2가 사이에 형성된 부락은 오궁동(五宮洞)으로 불렸다. 러시아영사관 동북방향으로 구러시아영사관 일부 부지도 포함되었으나 지금은 빼곡하게 민가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새문안교회 동쪽에서 당주동에 걸쳐있는 마을은 관청 납품용 메주를 쑤는 곳이 있다해서 붙여진 메주가맛골·훈조동(燻造洞)이 있었다.
신문로2가 23번지에 있었던 다리를 송교(宋橋), 옛전 경기여고를 들어가는 골목입구에 백목전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놓여있던 석교를 백목전다리(白木橋)라 하였다.
현재의 신문로1가는 동으로 세종로와 남으로 중구 정동, 서쪽은 신문로2가, 북쪽에 당주동이 있으며 동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새문안길이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흥화문
훈련도감터
원각사터
선공감터
무관학교터
함춘원터
새문안교회
구세군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