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 인근 지역이다.
신영동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5군영(軍營)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신영동 219 - 4번지로 이전하였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고종 4년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 상평방에 처음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 상평방내 경리청계에 속한 동명에서 신영동이 기록되어 있다. "상평방 경리청계 : 무계동, 부암동, 백석동, 홍지문내동, 삼지동, 구기동, 응암동, 왕정평, 신영동, 남문동"라고 적혀있다.
신영동의 명칭이 붙여진 유래를 『궁궐지(宮闕志)』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찾아보면 조선시대 5군영 중의 하나인 총융청으로 영조 때 북한산성 수비를 담당시키고 그 청사를 창의문 밖으로 이전시켰다고 하였다. 따라서 총융청이 새로 영조되었다 해서 신영동이라고 호칭된 것이다. 원래 총융청은 인조2년(1624)에 사직동 북쪽에 설치되었으나, 헌종 10년에 삼청동으로 청사를 이전시켰다가 영조 때에 신영동으로 다시 이전한 것이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총융청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었는데 영조 때 창의문 밖 연융대(鍊戎臺)에 이전해서 새로 설치했다. 신영의 영사(營舍)는 300년간이나 된다. 인조 때 창설되어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 등의 진 및 5영의 군무를 절제하게 하였고 영조 23년에 경리청을 폐지하고 총융청에 소속시켰다. 정조 때 수원에 영을 설치한 뒤에 수원진에서 군무를 절제하였다 폐지하고 헌종12년(1846)에 총위영(總衛營)이라고 개칭하였다가 3년후인 철종 원년에 다시 본명으로 고쳤으나 고종21년(1884)에 폐지되었다.
또한 탕춘대가 있던 부근의 시냇물이 감돌아가는 신영동 137, 139, 141 ~144번지 일대에는 승목소라는 부락이 있었고, 장의사(藏義寺)계곡은 봄철의 꽃, 여름의 과일, 가을철의 단풍이 어우러진 이곳은 세검정 일대의 수석과 함께 경관을 이루었으므로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줄지어 찾았던 곳이고 1970년 초까지 각급 학교의 소풍장소로서도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현재의 신영동은 북쪽으로 구기동, 동쪽으로 평창동, 서쪽으로는 홍지동과 남쪽으로 부암동이 둘러싸고 있으며, 서북부지역 주요간선도로인 진흥로(眞興路)와 세검정길이 신영동의 심장부를 뚫고 지난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세검정
장의사지
조지서터
총융청터
석부루터
부군당
탕춘대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