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서울대학교 병원 인근이다.
연건동의 동명은 연화방과 건덕방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주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는 연건동에는 자연부락명이 여럿 남아 있다. 과동(果洞) 혹은 과목동(果木洞)이라 부르던 곳은 22통 일대인데 과실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고 남미탑동(南彌塔洞)은 남이탑골이라고도 불렀는데 남이탑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126번지 일대이다. 세조 대 명장(名將)이며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南怡)장군의 집터인데 장군이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을 입어 억울하게 죽은 후 원한 대문에 터가 세다하여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되자 폐가(廢家)가 되어 쑥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순조 때까지 그저 채소나 지어먹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하루는 이 집터의 옆에 사는 사람의 꿈에 남이장군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사람은 장군을 위하여 원혼을 모시고 사당을 짓고 탑을 세웠다. 순조 18년(1818)에 공식으로 남이장군의 해원복권(解怨復權)이 된 이후의 이야기로 남이장군이 태어날 무렵 3년 동안이나 낙산(駱山)에 풀이 나지 않았던 곳이 장군의 집터이며 터의 한가운데 있던 큰 바위를 중심으로 해서 사당을 짓고 남이장군을 모셨다.
또한 남장우라는 마을은 경모궁의 남쪽 담 밖에, 북장우는 북쪽 담 밖에 있었고, 담골은 당골 또는 장동(墻洞)이라 불렀는데 어의궁(於義宮)의 담 북쪽에 있었다. 반송동(盤松洞) 또는 반송우물골은 연건동 66번지에 있었는데 우물가에 반송이 있었다. 반송정동(盤松井洞)이라고도 한다. 쉰골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자리에 있던 마을로 한적하므로 쉬어간다는 뜻이다.
서울대 부속병원 남쪽과 구 창경국민학교의 경계지점 부근의 고개는 나무가 울창해서 도깨비가 많이 살았으므로 도깨비고개라 불렀는데 독갑재 또는 독갑현(獨甲峴)이라고도 하였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뒷동산은 마두산(馬頭山)으로 임오군란 이후에 청나라 오조유(吳兆有)의 병영이 있었다.
연건동 66번지 부근에 32주의 반송이 있었던 곳을 어애송(御愛松)터 혹은 반송터라 불렀다. 영조 43년(1767)에 강릉부사 조진세(趙鎭世)가 심었던 소나무로 정조가 경모궁에 참배한 후 문희묘(文禧廟)터를 구경하기 위하여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표창하여 어애송이라 하였다.
연건동 29번지 서울의대 자리에 있던 경모궁(景慕宮)앞에는 응연교(凝 橋)가, 연건동 128번지와 이화동 171번지에 있던 장생전(長生殿)을 연결해주었던 다리는 장생전교(長生殿橋)·장경교(長慶橋)·장교(長橋)였으며 연건동 178번지와 이화동 184번지를 잇던 다리는 새로 만든 다리라 하여 신교(新橋) 또는 새다리라 불렀다.
연건동은 북으로 명륜동4가와 동으로는 대학로를 경계로 동숭동과 마주보며 남쪽은 효제동, 연지동, 충신동, 원남동과 인접해 있으며 서쪽은 창경궁로를 경계로 와룡동과 마주보고 있다. 지역 면적의 약 60%를 서울대 의대, 치대 및 부속병원이 차지하며 한국국제협력단과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주택가와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래로 동촌(東村)의 주택지로 손꼽히기도 하는 연건동은 율곡로, 창경궁로, 대학로가 동(洞)의 동, 서, 남쪽을 돌아지나므로 교통환경 여건으로는 최적의 지역이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서울대 부속병원
한국국제협력단
이정귀 집터
남이장군 집터
이석형 집터
구대한의원 본광
함춘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