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인근지역이다.
신문로2가의 동명은 돈의문(敦義門)을 새로 지은 성문이라는 뜻을 한자로 옮긴 것에서 비롯된다. 신문로2가는 경희궁과 돈의문이 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옛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농포동(農圃洞)은 농포안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 밖 신문로2가 7번지 일대에 채소를 가꾸는 농포가 있고 내관(內官)들이 관리했으므로 농포가 있던 일대를 일컫는 명칭이다.
새문동(塞門洞)은 태조 때 건축한 서대문인 서전문(西箭門)을 세종 때 폐지하고 그 남쪽에 새로 돈의문(敦義門)은 세웠으므로 서전문을 막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서전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사직터널 근방으로 추측되는데 사직동쪽 신문로2가 1번지 일대가 새문동에 해당된다.
순라동(巡邏洞)은 술랫골 혹은 순랏골이라고도 하는데 순라청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었다. 신문내(新門內)는 새문안이라 하는데 현 고려병원과 문화방송국 사이에 세종 때 돈의문을 새로 세웠으므로 광화문 방향의 새문안길 좌우쪽의 명칭이다.
오궁골은 오군골·오궁동·오중터라고도 하는데 피어선빌딩이 있는 일대이다. 세조 때 이인손(李仁孫)이 이곳에 살았는데 극배(克培)·극감(克堪)·극증(克增)·극돈(克墩)·극균(克均)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공신으로서 모두 봉군(封君)되었으므로 오군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오궁골이 되었다.
장생동(長生洞)은 조선시대 공신(功臣)의 도상(圖像)과 관재(管材)인 동원비기(東園秘器)를 보관하던 장생전(長生殿)이 있었기 때문에 명칭이 유래되었다. 장생전은 1395년에 경복궁 서쪽 사직단 근방에 지어 공신의 도상을 모셔두었으며 1411년에 이를 수리해서 사훈각(思勳閣)으로 개칭하고 태조와 개국공신의 도상을 모셨다. 1433년에 북부 관광방으로 옮겨 지은 후 장생전으로 환원하였고 1504년에 혜안전후동(惠安殿後洞)으로 옮겼다. 장생전의 관원은 도제조(都提調) 1명, 제조(提調) 3명, 낭청(郎廳) 3명이 있었는데 모두 겸직으로 도제조는 영의정, 제조는 호조·예조·공조판서가, 낭청은 호조·예조·공조낭관으로 임명되었다.
함춘원(含春苑)골은 경희궁 남쪽에 있는 동산으로 담을 둘러쌓고 나무를 기른 함춘원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지리적으로 보아 경희궁 맞은 편 새문안길 남쪽에 접한 지역으로 추축된다. 홍화문골은 홍화문동(弘化門洞)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있으므로 붙여진 지명이다.
현재의 신문로2가는 동으로 내수동, 당주동, 신문로1가와 남쪽으로 평동, 중구 정동, 충정로 서쪽은 송월동, 홍파동, 행촌동이 있으며 북으로 사직동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동 전체 면적의 약 절반은 경희궁 공원이 차지하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경희궁
돈의문터
이인손집터
비변사터
경찰박물관
성곡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돈의문박물관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