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서편 길이다.
원서동의 동명은 글자 그대로 창덕궁의 후원 서쪽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서동의 동명이 이루어지기 전의 이 지역의 동명은 원동(苑洞)이요, 또 그 이전의 동명은 원동과 같은 우리말 음인 원동(院洞)으 로서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 이 곳에서 원동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의 기록에서 부터이며 1914년에는 관상감(觀象監)이 있던 원서동 206번지 일대를 관상감골 혹은 관동(觀洞), 제생원이 있언 계동 140-2번지 현재의 원서공원 일대는 계동(桂洞) 혹은 제생동(濟生洞),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밖에 함춘원(含春苑)이 있었으므로 일대를 원골 혹은 원동(苑洞)의 일부를 합하여 원동으로 하였으며, 1936년 서울의 동리명을 모두 일본식 정(町)으로 고칠 때에 원서정(苑西町)으로 고쳤던 것이 광복후 정을 동으로 고쳐서 지금에 이른다. 한편으로는 창덕궁 밖에 정업원(淨業院)이 있었기 때문에 관동(館洞)과 대비, 원동(院洞)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원동(苑洞)이 되었다고도 전한다. 정업원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여승들의 수도처를 의미하는 명칭이다. 조선의 한양천도와 함께 창덕궁에서 가까운 곳에 정업원을 설치하였는데, 승려의 입성을 금지하는 조선사회에서도 왕궁 지척의 장소에 자리잡은 이 정업원만은 예외로 왕실의 비호와 원조를 받는 유일한 불교의 전당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곳 정업원의 성종 때 노예가 180여구에 이르렀으며 명종 때에는 많은 인력, 물력을 동원하여 인수궁(仁壽宮)을 정업원 경내에 짓기도 하였다. 정업원이 있었던만큼 이곳의 동명을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이 있던 지역의 동명 관동과 대비하는 원동(院洞) 또는 정업원동이라 하였다.
현재의 원서동은 창경궁의 서쪽에 위치함으로써 명칭이 유래된 원서동은 동으로 와룡동, 서쪽은 계동, 북쪽에 청운동이 있으며 남쪽은 율곡로를 경계로 운니동과 마주보고 있다. 창덕궁 담을 새로로 길게 형성된 전형적인 주택지구이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관상감 관천대
원서동 백홍범 가
북영터
사도사터
북촌창우극장
공간사(空間社)건물
임규집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