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서 창덕궁을 지나 대학로 방향으로 가는 4거리가 원남동이다.
원남동은 창경원의 남쪽에 있다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원남동의 옛마을로 단우물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진 단우물골은 감정동(甘井洞)이라 불렀고 배오개에서 박석고개까지 일대는 통안 혹은 통내(統內)라 불렀으며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있던 마을은 신민동(新民洞)이라 하였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명나라의 지사들이 청국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청의 원수를 갚기위해 우리나라에 찾아와 조선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종묘의 동북쪽 담 아래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살게 하였으므로 신민동이라 하였다.
종묘 동쪽의 원남동 첫째 골목은 통통학골이라 했는데 통내의 넒은 골목이라는 뜻이고, 잣배기고개는 원남동 로타리에서 연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잣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남동 로터리 동남쪽, 신민동과 대각선이 되는 방향의 마을을 염치낭골이라 하였다.
소용골은 황참의다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모양이 호리병과 같으므로 소용골이라 하며 소용동(所用洞)으로 썼는데 이것이 변하여 호동(壺洞)이 되었다. 순랏골은 원남동과 훈정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종묘를 순찰하는 순라청이 있었으므로 생긴 명칭이다.
원남동 76번지 서쪽에 있던 황참의다리는 황참의(黃參議)가 사재로 다리를 놓았으므로 황참의다리 또는 한자명으로 황참교(黃參橋)·황교(黃橋)라 하였다.
원남동은 1910년 12월 20일 충무로4가에서 창경원까지 경성전차가 신설되고 이어서 1915년 8월 18일 충무로4가선 연장선의 신설과 10월 30일 종로4가에서 창경원까지 복선이 건설되면서 창경원을 찾는 인파가 많아진 이후 상가지역으로 활발하게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원남동은 창경궁로가 동의 남북을, 율곡로가 동의 동서로 관통하며 기타 간선도로가 없는 주택 및 상가 밀집지역이다. 동의 남쪽 2/3지점까지 도로변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고 안쪽으로는 주택지가 조성되어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이항복 살던 곳
서울적십자병원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