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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1.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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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종로5가 종로5가역에서 동대문 방향의 지역이다. 종로5가의 동명은 종로에서 다섯번째의 거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종로5가는 남쪽으로 청계천, 동쪽으로는 성북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두다릿골은 종로4가와 종로5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두다리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이교동(二橋洞)이라고도 불렀다. 이교(二橋)는 두다리 외에도 재교(再橋)·연못골다리·연지동교(蓮池洞橋)로도 불렸는데 연못골과 연결되던 곳으로 종로5가 78번지와 효제동 331번지 근방을 이어주던 다리이다. 동대문에서 종로쪽으로 두번째 다리가 된다. 웃냇골은 개천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상천변동(上川邊洞)으로 불렸다. 청계천에 면한 지역이다. 한우물골은 큰 우물이 있으므로 한우물 또는 대정동(大..
65. 종로4가 종묘에서부터 광장시장까지의 거리이다. 종로4가의 동명은 종로의 네번째의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비롯된다. 종로4가는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다. 묘동(廟洞)은 대뭇골·대묘동(大廟洞)·대묘골 등으로 불려졌는데 종묘(宗廟)가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하피마동(下避馬洞)은 아래피맛골이라고도 하는데 종로4가와 예지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피맛골 아랫쪽에 위치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종로4가와 5가 사이에는 두다리 혹은 이교(二橋)·재교(再橋)·연못골다리·연지동교(蓮池洞橋)라 부르던 다리가 있었다. 동대문 쪽에서 두번째 다리가 되므로 붙인 이름이며 옛날의 연지동에 속했기 때문에 연못골다리라 했었다. 종로4가는 종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종로선과 종로4가(후에 돈암동까지 연장)까지 연결되는 전차노선이 있어서 더..
64. 종로3가 탑골공원 동편부터 종묘까지의 거리이다. 종로3가의 동명은 종로에서 세 번째의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종로3가는 조선시대 여러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엇으나 지금은 그 위치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종로3가는 종루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이와 관련된 시전상점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명주전골은 종로3가·낙원동·돈의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명주전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주동(紬洞)이라고도 하였다. 벙거짓골은 종로3가·관수동·장사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벙거지전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모곡동(帽谷洞)이라고 하였다. 행랑뒷골은 종로3가에서 6가까지 행랑을 지었는데 그 뒤에 있던 마을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웃너더리는 장사동(長沙洞) 근방..
63. 종로2가 종각역에서 탑골공원까지의 거리이다. 종로2가의 동명은 종로의 두 번째 거리가 된다 하여 유래되었다. 종로는 조선시대에 종루가(鐘樓街)·종가(鍾街) 또는 운종가(雲從街) 등으로 불렸다. 종로는 세종로 사거리 황토현에서 종로6가까지의 거리로 네거리에 층루(層樓)를 짓고 누(樓)위에 종(鐘)을 달고 그 아래로 사람과 우마(牛馬)가 다니게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보신각(普信閣)·종각(鐘閣)으로 불려지는 이 누각은 지금의 종로네거리에 있었으나 1915년의 남대문로 개수공사를 위한 도시계획에 따른 종로의 확장으로 원래보다 동남쪽으로 물러나 관철동에 2층 누각으로 새로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종각이 불타고 초석만 남게되자 이곳은 상인들의 노점터가 되었고 그 옆에 종각을 새로 세웠는데 규모가 작았다. 1..
62. 종로1가 광화문역에서 종각역까지의 거리이다. 종로1가의 동명은 보신각 종이 있는 거리의 첫머리에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지금 종로1가일대는 성내를 중심으로 하던 옛날 서울에 있어서 동서남북 4정문의 통로를 연결하는 십자가였던 만큼 조선 초기 한양천도 진작부터 수도 서울의 중심지 대시가로 되었으며 저녁에 인정(人定) 아침에 파루(罷漏)로 대종을 쳐서 도성의 입문을 개폐하게 하던 종루(鍾樓)가 세워진 후로는 이 거리를 종루십자가 또는 운종가(雲從街)로 불렀다. 지금의 종로의 명칭도 이 십자가상에 종로가 세워진 데에서 연유하였으며, 또 조선의 한양전도 후 세워졌던 종로는 지금도 위치와 명칭은 바뀌었을 망정 십자가로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아서 세고(歲古)의 여운을 풍겨주고 있다. 종로1가는 조선시대에 시전상가(市廛..
61. 적선동 경복궁역 주변 지역이다. 적선동의 동명 유래는 이 지역이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적선방이었기 ?문에 지명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원래 왕가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에 이웃하고 또 의정부를 위시한 중요 관청과도 인접하여 있었기 ?문에 특별히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옛 글귀의 뜻을 취하여 이곳은 적선, 그 남쪽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 남측 일대는 여경이라 하였다. 적선동은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 서부 인달방과 적선방에 걸친 지역이었다. 적선동은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경복궁과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관아명칭에 따른 동명이 많았다. 월궁동(月宮洞)은 월성위궁골이라고도 하는데 여조의 둘째부마(月城尉) 김한신(1720~1758)이 살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김한신의 자는 유보(幼輔)..
60. 재동 안국역 헌법재판소 주변 지역이다. 재동은 잿골을 한자로 옮긴 데서 유래된다. 잿골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왕위 계승의 뜻을 품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심복인 권람(權覽)의 추천으로 한명회(韓明會)를 만나 단종7년(1453) 단종이 누이 혜경공주(惠敬公主) 즉 영양위(寧陽慰) 정종(鄭淙)의 집에 행차한 기회를 이용하여 무사들을 매복시키고, 어린 단종을 성실히 보필하는 황보인(皇 仁)등을 유인하여다가 참살할 때 이들이 흘린 피로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나므로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 초목회(草木灰) 즉 재를 모두 가지고 나와서 붉은 피를 덮으니 동중은 온통 회(灰)로 덮였다. 그 후부터 이곳을 잿골 즉 회동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그 회동의 잿골이 재동의 잿골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재동을 이룬 옛부락은 잿..
59. 장사동 종로3가역과 청계천 사이 세운상가가 있는 지역이다. 청계천 쪽의 사토(沙土)가 장사형(長蛇形)을 이루었으므로 그 뜻을 따서 장사동의 동명이 생겨났다.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개천(청계천)변에 위치한 동시에 돈화문(敦化門)앞을 흘러내려오는 하천이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어구에 자리잡은 장사동은 이와 관련된 옛지명이 많다. 장사동 20번지 서북쪽의 다리는 웃너더리 또는 상판교(上板橋)라 했으며 84번지 서북쪽 다리는 아래너더리 또는 하판교(下板橋)라 하였다. 중구 입정동 5번지와 장사동 20번지 청계천 사이에 놓였던 다리는 새로 놓은 다리라 하여 신교(新橋)·새다리라 불렀다. 이 다리 부근에는 화류장을 전문으로 만들어 장농집이 있으므로 화류교(樺榴橋)라고도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하리곳다리 하랑교(河浪橋)·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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