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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1.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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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옥인동 서촌마을에서 수성동계곡이 있는 지역이다. 옥인동의 동명은 옥동(玉洞)과 인왕동(仁王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옥인동의 동명이 유래된 옥동은 옥류동(玉流洞) 혹은 옥골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옥인동과 통인동에 걸쳐있는 지역이다. 옥인동 47번지 북쪽 돌벽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고 하는 「옥류동」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개인의 집 담안으로 들어가 찾아보기가 어렵다. 서로 혼용해서 사용된 동명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는 영조 때에 그려진 「도성지도(都城地圖)」와 「옥동척강(玉洞陟崗)」이라는 그림인데 둘다 겸제 정선의 작품으로 지도에는 옥류동으로, 그림의 제목에는 옥동으로 되어 있다. 그림은 세종의 왕자 영해군의 후손이 이춘제(李春 )의 집 후원에서 모임을 가진 후 청나라 청옹정제..
49. 예지동 광장시장과 청계천 사이의 지역이다. 인의동에서 종로4가를 지나 동남쪽으로 향하면 그 일대가 예지동인데 동학(東學)이 근처에 있으므로 유학의 대강(大綱)인 효제(孝悌), 충신(忠信), 인의(仁義), 예지(禮智)의 이름을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예지동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옛마을로는 냇골 혹은 냇게라고도 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것은 청계천변에 위치하므로 냇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냇골의 윗쪽에 자리잡은 마을은 상천변동(上川邊洞) 혹은 웃냇골·웃냇개라 하였다. 중구 주교동 146번지와 예지동 135번지 사이에는 효경교(孝經橋)가 있었다. 효경다리·효경교·효교(孝橋)라고도 불렸는데 『동국여지승람』『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영풍교(永風橋)로 되어있다. 부근에 소경들이 많이 살아서 소경다리라 하..
48. 연지동 대학로와 종로5가 사이 지역이다. 연지동의 동명유래는 이곳에 큰 연못이 있어서 유래되었다. 연지동을 이룬 냉정동(冷井洞)은 찬우물골이라 하는데 어의궁(於義宮) 남서쪽에 물맛이 매우 찬 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고 연지동은 연못골이라고도 한다. 연지동의 동명칭 유래는 이 연지동이 속하였던 방(坊)의 명칭인 연화(蓮花)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에는 동·서·남쪽에 연못이 있었는데 동지(東池)는 동성(東城)의 연동(蓮洞)에, 서지(西池)는 돈의문(敦義門) 밖 모화관(慕華館) 옆에, 남지(南池)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연못은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하고 이들 연못에서 나오는 연자(蓮子)는 왕실용으로 진공하였다. 그런데 동지가 성(城) 안인지 밖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47. 연건동 대학로 서울대학교 병원 인근이다. 연건동의 동명은 연화방과 건덕방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오랫동안 주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오고 있는 연건동에는 자연부락명이 여럿 남아 있다. 과동(果洞) 혹은 과목동(果木洞)이라 부르던 곳은 22통 일대인데 과실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고 남미탑동(南彌塔洞)은 남이탑골이라고도 불렀는데 남이탑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126번지 일대이다. 세조 대 명장(名將)이며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南怡)장군의 집터인데 장군이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을 입어 억울하게 죽은 후 원한 대문에 터가 세다하여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되자 폐가(廢家)가 되어 쑥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순조 때까지 그저 채소나 지어먹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하루는..
46. 안국동 안국역에서 북촌쪽 지역이다. 안국동의 동명은 이곳이 조선초기부터 있어오던 북부 10방 중의 하나인 안국방의 방명을 그대로 동명으로 한데서 유래된다. 대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선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의 지역을 차지하였던 북부의 여러 방은 북악, 인왕의 두 산아래에는 비록 인구는 희소할 망정 연적이 넓고 경치가 좋은 곳도 많았지만, 그 이남 즉 경복궁 동서쪽의 지역에는 방리의 면적이 그리 넓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한 방내의동, 계도 그 수효가 많지 않았다. 안국방도 다른 경복궁 동측에 자리잡은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방(嘉會坊)등과 같이 영조 때의 기록에서도 방명을 그대로 동명, 계명으로 한 안국동계(安國洞契)하나 만이 보인다. 이러한 안국방, 안국동이 갑오개혁때에 이르러서는 많이 발전하였던 모..
45. 신영동 세검정 인근 지역이다. 신영동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5군영(軍營)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을 신영동 219 - 4번지로 이전하였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고종 4년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 상평방에 처음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 상평방내 경리청계에 속한 동명에서 신영동이 기록되어 있다. "상평방 경리청계 : 무계동, 부암동, 백석동, 홍지문내동, 삼지동, 구기동, 응암동, 왕정평, 신영동, 남문동"라고 적혀있다. 신영동의 명칭이 붙여진 유래를 『궁궐지(宮闕志)』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찾아보면 조선시대 5군영 중의 하나인 총융청으로 영조 때 북한산성 수비를 담당시키고 그 청사를 창의문 밖으로 이전시켰다고 하였다. 따라서 총융청이 새로 영조되었다 해서 신영동이라고 호칭된 것이다. 원..
44. 신문로2가 경희궁 인근지역이다. 신문로2가의 동명은 돈의문(敦義門)을 새로 지은 성문이라는 뜻을 한자로 옮긴 것에서 비롯된다. 신문로2가는 경희궁과 돈의문이 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옛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농포동(農圃洞)은 농포안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 밖 신문로2가 7번지 일대에 채소를 가꾸는 농포가 있고 내관(內官)들이 관리했으므로 농포가 있던 일대를 일컫는 명칭이다. 새문동(塞門洞)은 태조 때 건축한 서대문인 서전문(西箭門)을 세종 때 폐지하고 그 남쪽에 새로 돈의문(敦義門)은 세웠으므로 서전문을 막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서전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사직터널 근방으로 추측되는데 사직동쪽 신문로2가 1번지 일대가 새문동에 해당된다. 순라동(巡邏洞)은 술랫골 혹은 순..
43. 신문로1가 광화문 흥국생명 건물부터 광화문역까지의 영역이다. 신문로1가의 동명은 서대문(西大門)의 속칭이 새문이므로 이를 한자로 옮겨 적은데서 유래된다. 신문로라는 지명은 길가 서쪽 언덕위에 도성(都成)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서대문은 원명이 돈의문이었으며, 또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됨에 따라서 서전문(西箭門), 신문(新門), 새문으로도 불렸다. 1914년 서대문정이 형성되기 전에도 이 부근에는 신문내라는 동리가 있었으며, 그 곳을 새문안 그 지역내에 있는 교회를 새문안교회로 부르는 것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문로1가는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번잡한 곳에 속하였다. 따라서 여러부락이 합쳐져서 신문로1가를 형성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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