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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1.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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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린동 종로1가 SK빌딩이 있는 블록이다. 서린동은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여 구획했던 행정구역 가운데 중부(中部) 8방(坊)의 하나인 서린방(瑞麟坊)의 방명을 그대로 동명으로 한 것이다. 서린동을 형성하던 옛지명 가운데 낭후(廊後)·사기전동(砂器廛洞)·주전동(紬廛洞)·백목전동(白木廛洞)·합동(蛤洞)등 시전과 직접 관련을 가진 것이 많다. 도성안의 시전(市廛)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커서 행세를 하였다는 육의전(六矣廛) 가운데 면포전(綿布廛)·목전(木廛)·지전(紙廛)·포전(布廛)·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이 서린방 내에 있었던 것도 상업이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는 도성의 중심지인 옛날 운종가의 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상업지인 동시에 주거지로서의 기능 수행도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서린동 일대에는..
33. 삼청동 경복궁 동편 뒷쪽이다. 삼청동의 동명은 도교(道敎)의 삼청전(三淸殿)이 있어서 유래되었다. 삼청동은 도성(都城)의 북쪽지구에 해당되면서 경복궁의 동북지역인데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그래서 사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는 뜻의 삼청(三淸)이 되었다. 삼청동은 옛날부터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계곡물이 흘러 내려 도심인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었으므로 바위나 다리, 우물, 골짜기 등에 얽힌 이야기와 이름도 많이 남아있다. 가까이 있을 때에는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떠나기가 싫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서 뛰어가 보고 싶은 것이 삼청동의 맑고 깨끗하고 그윽한 경치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명사(名士)들이 이곳을 찾아와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었는데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다음과 같은 시(詩..
32. 사직동 사직단 주변과 황학정 인근 지역이다. 사직동의 동명이 보이는 것은 퍽 오래 전부터의 일로서 영조 27년(1751) 9월에 왕이 성내 시민의 도성수호에 대한 절차 등을 윤음으로 반포하는 중에도 사직동계의 명칭이 보인다. 그리고 1914년 경성부제의 실시와 함께 동리간의 구역을 재조정할 때에는 옛 사직동의 일부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무덕문골 혹은 줄여서 무덕동이라는 마을로서 무덕문은 사직동에서 신문로 2가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던 것으로 경희궁의 북문이었다. 그리고 사직동과 내수동에 걸쳐 박우물이 있다하여 박우물골 또는 박정동(朴井洞)이라는 마을과 도정궁(都正宮) 앞 등 너머에는 너멍골이, 사직동 서쪽에는 창평동(昌平洞)을 합하여 사직동으로 하였는데, 동명은 사직단(社稷壇)이 있음으로 해서..
31. 사간동 경복궁 동십자각 뒷편 지역이다. 중학동 북동쪽 경복궁담의 동쪽 일대를 옛날부터 간동(諫洞) 또는 사간동으로 불러 오는데, 그것은 이곳 경복궁 건춘문(建春門)의 길 건너편에 사간원이라는 관청이 있었던데에 연유한 것이다. 한말까지 중학동(中學洞), 송현(松峴), 벽동(碧洞), 간동(諫洞)이 모두 관광방(觀光方) 중학계(中學契) 안에 있었는데 1914년 부제 실시 때 옛 간동에 다시 벽동의 일부를 포함하여 사간동으로 개편하였다. 사간동의 동명유래가 된 사간원은 왕에 대한 충고기관으로 왕의 과실이나 여러 정령(政令)의 득실에 대해 간쟁(諫諍), 논박(論駁)하는 일을 맡았다. 사간동은 사간원이 있던 간동과 송현동, 중학동, 사간동 사이에 걸쳐 형성된 벽동으로 이루어졌다. 벽동은 다락골 혹은 벽장골이라고도 하는데 ..
30. 부암동 청와대 뒷편에서 상명대 사이의 동네이다. 부암동은 세검정(洗劍亭)쪽 길가에 높이 2m의 부침바위(付岩)가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부암동은 무계동(武溪洞), 백석동(白石洞), 부암동(付岩洞), 삼계동(三溪洞)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한산과 인왕산 자락에 위치하므로 바위, 계곡 등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무계동은 자하문 밖 서쪽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로 수석(水石)이 맑고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있는 계곡처럼 생겼다 해서 무계동이 되었는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武溪洞」의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안평대군이 이곳에서 산정(山亭)을 세워 무계정사(武溪精舍)라 이름을 붙이고, 글을 읊고 활을 쏘는 등 심신을 단련하였다. 무계정사를 짓기 전에는 세종..
29. 봉익동 종로3가역과 종묘 사이의 동네이다. 봉익동은 종묘와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태묘(太廟)·대묘(大廟)라고도 부르는 종묘(宗廟)와 담을 같이 하므로 일대의 동네를 대묘동·대묘골이라 하였고 종묘 앞으로 흐르는 큰 개울가의 넓은 반석은 빨래를 하는 마전으로 이용되었으므로 마전이 잇는 동이라 하여 마전동(麻田洞)이라 했는 데 줄여서 마동(麻洞)이 되었다. 대정동(大井洞)은 큰우물이 있으므로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봉익동의 「봉익」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 한성부 5부 52방과 갑오개혁 이후 5서(暑) 47방(坊)에 속한 동(洞)이나 계(契)의 이름에서도 이와 유사한 명칭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봉익이란 흔히 봉황새의 날개를 말하고 봉(鳳)은 임금을 뜻하기 때문에 봉자(鳳字..
28. 무악동 독립문역 종로쪽 방향 인왕산 아래쪽 마을이다. 무악동은 1975년 서대문구 현저동의 일부가 종로구로 편입되면서 옛날 중국사신들이 오르내리던 무악현저(毋岳峴底)에 있다하여 붙여진 동명이다. 무악동은 무악현 아래에 있는 마을이므로 그 뜻을 따라 현저동으로 되었다가 다시 무악현의 이름을 따서 무악동으로 되었는데 이 무악현은 시대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조선말까지는 중국사신의 유숙소인 모화관이 영천동에 있었으므로 모화관의 앞 곧 인왕산쪽의 동쪽 지점을 관전동(館前洞)이라 했고 그 반대쪽은 관후동(館後洞)이라 하였다. 홍제원(弘濟院)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모화현(慕華峴)이라 했는데 지명으로 변하여 통칭하게 되었다. 홍제원 북쪽에는 홍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홍제천은 사천(沙川)이라고 불렀다. 때문에 사천..
27. 묘동 종로3가역 3호선라인 인근의 지역이다. 묘동은 이곳이 조선왕조 역대왕 및 배위(配位)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제사드리는 종묘(宗廟)에서 가깝다는 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14년 4월 1일 동명 제정시 누동·마동·묘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수은동(授恩洞)으로 하였다. 이때의 동명은 강제로 한국을 병합한 일제에 대해 반감을 갖는 한국인이 많았으므로 민심수습을 위해 소위 은사금(恩賜金)이란 명목으로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돈을 주며 기술을 가르치던 은사수산장(恩賜授産場)이 있었으므로 붙여졌다. 또한 1955년 4월 18일 동설치 조례에 따라 동장관할 구역의 행정동제를 실시하여 묘동은 훈정동·봉익동 일원과 함께 신설된 대묘동사무소의 관할에 속하였다. 이 때의 동명은 종묘(宗廟)를 태묘(太廟) 혹은 대묘(大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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