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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1.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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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인의동 종로4가 종묘 동쪽지역이다. 성균관의 아랫쪽에 있고 사학(四學)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있으므로 유학의 대강인 효제(孝悌), 충신(忠信), 인의(仁義), 예지(禮智)의 이름을 따서 인의동이라 하였다. 인의동은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가정동(嘉井洞)은 더운우물 부근에 작은우물이 있었으므로 개우물골이라고도 부른다. 연지동에 걸쳐 있는 곳은 연지골, 훈정동에 걸쳐 있는 지역은 후정동(後井洞)이라 부른다. 등자리(登子厘) 있는 마을은 등자동(登子洞)·등자전골·등잣골이라 불렀다. 한편 28번지와 이현궁지 일대는 대한제국시대의 보병연대가 자리 잡았다. 이중 28번지 일대는 후일 주택지구로 분할되었으므로 새로 생긴 터라는 뜻으로 생긴 터라는 뜻으로 새터 신기동(新基洞)으로 부른다. 인의동·종로4가·예지동..
57. 인사동 종로 탑골공원 옆 인사동 거리이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중부 관인방(寬仁坊)의 「인」자와 대사동(大寺洞)의「사」자를 취하여 지어진 것이다. 『한경지략』권2 각 동조를 보면 「대사동은 곧 탑사동(塔寺洞)인데 옛날에는 원각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한경지략』은 순조(1801~1834)연간에 지어진 책인데 이 때에는 대사동과 탑사동으로 혼용하여 불리워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러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인사동은 대사동에서부터 동명 유래가 되는데 댓절골·사동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졌으며 지금의 인사동과 관훈동 사이에 걸친 마을이다. 큰 절인 원각사(圓覺寺)가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향정동(香井洞)은 향우물골·향나무우물골·상우물골로도 불렀는데 우물 옆에 향나무가 있었으므로 명칭이..
56. 익선동 종로3가역 뒷쪽 지역이다. 익선(益善)이란 그 글자 그대로 '더욱 착하다' '더욱 잘한다'는 의미인데 중국의 한(漢) 고조(高祖)가 명장 한신(韓信)에게 "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고 잘 싸울 수 있느냐"고 물을 때 자신있게 "신(臣)은 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익선동의 동명은 용병(用兵)이나 글자의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정선방의 익랑(翼廊)골에서 비롯되었다. 익선동의 옛 지명으로는 돈화문로 73(와룡동 161번지) 앞에 다락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대를 다락골 또는 누동·다락우물이라 불렀다. 돌우물골은 석정동(石井洞)이라고 하는데 누동궁쪽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우물이 있었으므로 마을이름이 연유되었다. 한동은 한양골·한양동이라고도 불렀는데 낙원동·돈의동에 걸쳐 있..
55. 이화동 대학로와 종로5가가 이어지는 지역이다. 이화동의 동명은 지금 이화동 2번지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에서 유래되었다. 이화동의 옛마을로는 동숭동과 이화동에 걸쳐있던 쌍계동(雙鷄洞)이 있다. 기묘한 암석 울창한 수림에 두줄기의 맑은 시냇물까지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삼청(三淸) · 인왕(仁王) · 쌍계(雙鷄) · 백운(白雲) · 청학(淸鶴)이라 하여 도성안의 5대 명소 가운데 세 번째로 꼽혔다. 효제동은 효젯골 · 병골 · 호동(壺洞)이라고도 불렀는데 이화동 25번지 일대의 마을이다. 선조 때의 부제학 유숙(柳肅) · 승지 유섭(柳燮) · 유활(柳活) 3형제가 서로 처마를 잇대어 살면서 부모 모시기를 한결같이 하므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효자형제가 모여사는 집이라 부르던 것이 효자가(孝子家), 효제가(孝悌家), ..
54. 원서동 창덕궁 서편 길이다. 원서동의 동명은 글자 그대로 창덕궁의 후원 서쪽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서동의 동명이 이루어지기 전의 이 지역의 동명은 원동(苑洞)이요, 또 그 이전의 동명은 원동과 같은 우리말 음인 원동(院洞)으 로서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 이 곳에서 원동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의 기록에서 부터이며 1914년에는 관상감(觀象監)이 있던 원서동 206번지 일대를 관상감골 혹은 관동(觀洞), 제생원이 있언 계동 140-2번지 현재의 원서공원 일대는 계동(桂洞) 혹은 제생동(濟生洞),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밖에 함춘원(含春苑)이 있었으므로 일대를 원골 혹은 원동(苑洞)의 일부를 합하여 원동으로 하였으며, 1936년 서울의 동리명을 모두 일본식 정(町)으로 고칠..
53. 원남동 경복궁에서 창덕궁을 지나 대학로 방향으로 가는 4거리가 원남동이다. 원남동은 창경원의 남쪽에 있다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원남동의 옛마을로 단우물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진 단우물골은 감정동(甘井洞)이라 불렀고 배오개에서 박석고개까지 일대는 통안 혹은 통내(統內)라 불렀으며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있던 마을은 신민동(新民洞)이라 하였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명나라의 지사들이 청국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청의 원수를 갚기위해 우리나라에 찾아와 조선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종묘의 동북쪽 담 아래 잣배기고개 남서쪽에 살게 하였으므로 신민동이라 하였다. 종묘 동쪽의 원남동 첫째 골목은 통통학골이라 했는데 통내의 넒은 골목이라는 뜻이고, 잣배기고개는 원남동 로타리에서 연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잣나무가..
52. 운니동 계동 현대사옥 건너편으로 운현궁이 있는 쪽이다. 운니동의 동명은 이곳에 있는 운현궁과 니동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운니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니동(泥洞)은 익선동과의 경계가 되는 소로(小路)의 남쪽인데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이곳을 니동으로 표시하였으므로 이 길을 진골이라 호칭해오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진골은 니동 뿐만 아니라 습동(濕洞)으로도 표기되는데 이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서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여지므로 니동으로 정착된 것은 영조 이후로 여겨진다. 교동국민락교 뒤의 고개는 비만 오면 땅이 몹시 질퍽거렸으므로 구름재 또는 운현(雲峴)으로 불렀는데 운니동 동명 유래가 된다. 서운관 남쪽의 고개이름이 운현이고 운현의 남쪽 근방 운니동 80·85·114번지 일대에 흥선대..
51. 와룡동 창경궁, 창덕궁과 성균관대학교 후문쪽이다. 와룡동의 동명은 임금이 기거하던 창덕궁이 있으므로 나라의 상서(祥瑞)인 와룡, 봉익의 이름을 따온데서 유래된다.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고개는 건양현(建陽峴)이라 하는데 「건양다경(建陽多慶)」에서 비롯되었으며 두 궁궐이 모두 역대 임금이 거처하던 곳이므로 경사스러운 일이 많았다는 뜻을 지닌다. 와룡동과 묘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다락우물이 있었으므로 다락우물골, 다락골 줄여서 누동(樓洞)이라 하였다. 창경궁과 창덕궁이 있는 이곳을 와룡동이라 한 것은 옛날 동양에서 왕을 용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황제를 상상의 신령한 동물인 용에 비겨서 황제의 얼굴을 용안(龍顔), 앉는 자리를 용상(龍床)이라 하였으며 또 타는 수레를 용가(龍駕), 배를 용주(龍舟)라고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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