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ffbeat Explorer/1. 종로구

(80)
18. 누하동 배화여자대학교부터 통인시장 사이, 누상동 아래의 지역이다. 누하동은 남척동(南隻洞), 송목동(松木洞), 장성동(長成洞), 오거리(五巨里), 유목동(柳木洞), 누각동(樓閣洞) 일부를 합쳐 누각동 아랫쪽에 있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후기 이래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동이다. 이 가운데 누하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누각동의 지명은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표시되어 있다. 누각은 연산군 때 지었던 정자가 아니고 광해군(光海軍) 때 건축한 인경궁(仁慶宮)으로 증·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됨에 따라 이후 빈집으로 두자 황폐되어 빗물이 새는 누각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누각골에 사는 사람들도 양반 사대부가(士大夫家)가 아닌 ..
17. 누상동 서촌마을에서 수성동 계곡 옆쪽 마을이다. 누상동은 1914년 4월 1일 경성부(京城府)의 동명을 새로 제정 실시함에 따라 누각동의 위치한 북부 순화방의 누각동(樓閣洞)의 일부를 누상동이라 하였다. 고종 초 편찬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각동은 인왕산 아래에 있고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지금은 여항(閭巷)의 서리노퇴자(胥吏老退者)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화과업(花果業)에 종사하는 자가 많다. 누각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된 타당성은 인정하나 과연 연산군 때 누각을 지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시 된다. 여기서 누각이라 함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건물이 될만큼 규모가 큰 누각 건물로 민가의 것이라기 보다 궁궐과 관련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
16. 내자동 경복궁역, 서울지방경찰청, 세종마을 먹자골목을 아우르는 동네이다. 내자동의 동명이 유래된 내자사(內資寺)는 호조(戶曹)소속 관서이다. 고려 때부터 있어왔던 의성고(義成庫)를 태종 3년(1403)에 내자시로 고쳤는데 궁내에 미(米), 면(麵), 주(酒), 장(醬), 유(油), 견(絹), 소(蔬), 과(果), 내연(內宴), 직조(織造)등의 공급을 담당하였다. 『고려사』에는 내자시나 의성고가 보이지 않는 대신 내방고(內房庫)가 있다. 충선왕(忠宣王) 원년(1309)에 운진창(雲臻倉)을 부흥창(富興倉)에 합하고 의성창(義成倉)으로 개칭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에는 내방고로 고쳤다. 여기에 보이는 의성창 또는 내방고가 내자시의 전신인 의성고와 같은 관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자시의 위치에 대하여는 『동국여지..
15. 내수동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경복궁역 사이의 동네이다. 내수동의 동명은 옛날 내수사(內需司)라는 관청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14년에 동명을 개정할 때에는 영빈동(英嬪洞), 누정동(樓井洞), 승전교(承傳橋), 내수사전동(內需司前洞), 내수사와 사직동(社稷洞), 박정동(朴井洞), 종교(宗橋), 대창동(大昌洞), 북문동(北門洞)의 각 일부를 합하여 수창동(需昌洞)으로 이름하였다가 뒤에 내수동으로 고쳤다. 옛날에는 이곳이 서부 인달방(仁達坊) 관내에 속하였다. 내수사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궁내에서 쓰는 미곡, 포백(布帛), 잡물과 노비 등의 수요를 공급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다. 궁중의 수용(需用)도 물론 정상적인 경용(經用)은 호조나 탁지부에서 공급하였던 만큼, 본사(本司)에서 공급하는 것..
14. 낙원동 탑골공원 뒷쪽 음식점이 많은 쪽이고 익선동과 접하고 있다. 낙원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제정에 따라 이전 중부 경행방 교동, 탑동, 어의동, 주동의 각 일부와 정선방의 한동과 관인방의 원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시내 중앙의 낙원지라 할 만한 탑골공원이 있으므로 낙원동이라는 동명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낙원동은 서울의 북촌(北村)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과 관련이 깊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서울의 중심 지역으로 되어 온 곳이기도 한다. 교동(校洞)은 경운동과 인접지역인데 낙원동 280번지에 향교(鄕校)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향교동 혹은 향곳골이라고도 하며 낙원동 271~283번지 일대이다. 원동(園洞)은 인사동과 낙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원골이라고도 부른다. 탑동(塔洞)은 탑골이라고..
13. 권농동 종묘와 익선동 사이의 길이다. 권농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 곳에 있던 채소재배를 권장하는 농포서(農圃署)의 이름을 따서 권농동이라 하였다. 권농동은 농포동, 마동, 수문동, 숭문동이 모여서 이루어진 동명인 만큼 농사와 관련이 깊다. 농포동은 돈화문 밖 동쪽에 궁중에서 필요한 내농포(內農圃)가 있어서 붙여진 동명인데 농포안이라고도 하고 농파니라고도 불렀다. 지금 창덕공원으로 조성된 일대가 농포안이었다. 마동(麻洞)은 마전골 혹은 마전동(麻田洞)이라고도 하는데 와룡동, 봉익동, 권농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대략 권농동 185~190번지 일대가 된다. 창덕궁에서 흘러내린 물이 종묘전교(宗廟前橋)와 파자교(把子橋) 사이로 들어가므로 냇가의 폭이 넓고 반석도 많았다. 이 때문에 빨래터로 최적..
12. 궁정동 청운동 주민센터에서 청와대쪽 동네이다.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많이 알려진 동 이름이다. 궁정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북부 순화방의 육상궁동, 동곡, 온정동, 신교, 박정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육상궁의 「궁」자와 온정동, 박정동의 「정」자를 따서 궁정동이라 하였다. 궁정동의 동명과 함께 지금도 고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육상궁(毓祥宮)의 건물이다. 지금 청와대 서쪽, 바로 북악밑에 자리잡은 육상궁은 처음 영조가 그의 생모인 최씨를 위하여 세웠던 사묘(祠廟)였다. 궁정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동골은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육상궁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동곡(東谷)이라고도 한다. 박우물골은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박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
11. 구기동 상명대 동북쪽 북한산이 있는 지역이 구기동이다. 구기동은 구텃굴이라는 동명을 한자로 옮긴데서 유래된다. 조선시대 한성부 상평방(常平坊)내 구텃굴이었다가 일제 때 이르러 1914년 4월 1일 경성부제 실시에 따라서 세곡(細谷)을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하였으며, 광복후 1949년 8월 13일에는 다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구기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5년 4월 18일에 서울특별시 동제실시에 의하여 구기동은 법정동인 평창동과 함께 행정구역명인 평창동에 속하여 되었는데 1975년 10월 1일 종로구로 편입되었다. 구텃굴은 무엇에 대한 구터인지 그 연원을 확인할 수 없지만 구기동을 이루고 있는 자연촌락 가운데서 "구터"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구기동의 자연촌락으로는 가늘굴·먹정굴..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