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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신동 대신동 동명은 인근에 있는 대현동의 ‘대’자와 신촌동의 ‘신’자를 따서 합성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광복 직후부터 동회 명칭이었던 것을 1962년에 법정동을 새로 설치하면서 그 명칭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대신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성외) 아현계였다.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북부 연희방 아현계로 되어 있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北署 연희방 아현2계 대현동・신촌이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를 5부 36방으로, 성외를 8면으로 할 때 경성부 연희면 대현동・신촌으로 되었고,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신촌리의 일부로 되었다. 1936년 4월 1일 ..
2. 대방동 대방동 동명은 조선시대에 높은절과 번댕이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었는데, 이를 합하여 한자명으로 番大方里라고 표기하였다가 대방동으로 고친 데서 유래되었다. 대방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始興郡 下北面 番大方里였으며,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시흥군 북면 번대방리로 칭하였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번대방리 중 상도천 우안 지역이 경성부에 편입되어 경성부 번대방정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가 실시되면서 영등포구에 속하였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영등포구 대방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
2. 대림동 대림동 동명은 신대방동의 ‘대’자와 신도림동의 ‘림’자를 따서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대림동은 조선시대에는 경기 시흥현 상북면에 속하였으며, 갑오개혁의 추진에 따라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인천부 시흥군 상북면에 속하였다가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해 실시된 13도제에 따라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시흥군 상북면・하북면과 과천군 하북면・상북면 일부를 합하여 시흥군 북면을 신설하고, 시흥군 상북면의 사돈리・도야미리・원지목리를 합하여 도림리라 하고, 시흥군 하북면의 번대방리와 우와피리를 합하여 번대방리로 명명한 것이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의 구역을 확장할..
4. 당인동 당인동 동명은 ‘댕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현재 당인리발전소 일대에 명나라 李如松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던 사실과 관련된다. 중국을 상징하여 부르는 唐나라를 따라 중국인을 당나라 사람, 즉 당인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일설에는 이 부근의 양화나루터에 貢物을 나르는 배들이 드나들었으므로, 이 동리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왕래하였다고 하여 多人洞이라 한 것이 변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인동은 조선 전기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였다.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서부 서강방(성외) 당인리계로 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西署 서강방(성외) 당인리계 당인리로 칭하였다. 19..
1. 당산동 당산동 동명은 웃당산마을, 지금의 당산동 110번지에 우뚝 솟은 單山이 있었는데 이곳에 당집이 있어서 洞祭를 지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당산동은 영조 때는 경기도 금천현 상북면 당산리로 되었다가 영조 19년(1795) 2월 1일에는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바뀌었다.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할 때 인천부 시흥군 상북면 당산리가 되었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해 실시된 13도제에 따라 인천부에서 벗어나 경기도에 다시 속하였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상북면 양진리와 당산리를 합하여 시흥군 북면 당산리가 되었다. 1917년 10월 1일 경기도령 제6호에 의해 북면 중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던 영등포리・당산리・양평리의 3개리..
7. 다동 다동 동명은 조선시대 다도와 차례를 주관하던 사옹원에 속한 茶房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다동은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광통방의 일부였으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는 한성부 남부 광통방 大多坊北邊契・小多坊南邊契・모전계 지역인데, ‘多坊’은 茶房을 우리말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大多坊은 큰 다방, 小多坊은 작은 다방을 의미한다. 그 뒤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 南署 광통방 상다동, 다동계 중다동・하다동, 中署 서린방 합동계 모교로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획정에 따라 경기도령 제3호와 경기도고시 제7호로 남부 중다방과 모교 상다동・하다동 각 일부를 합쳐 다옥정으로 하였으며,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가 실시되면서 중구의 관..
4. 능동 능동 동명은 1904년 11월에 순종의 순명황후 민씨의 묘역인 裕康園(裕陵)이 마련되어 능말・능리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능동은 조선시대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하였으며,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에 편입되어 한성부 南署 두모방(성외) 전곶계 능동이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성부를 5부 36방, 성외를 8面으로 할 때 경성부 두모면 능동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능리가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성동구 능리가 되었으며, 1950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성동구 능동이 되었다. 1995..
2. 논현동 논현동 동명은 좌우에 논밭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로 높은 고개가 있어서 이 고개를 논고개, 한자명으로 논현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논현동은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동(논고개 아래의 자연마을인 부처말・비말・절골・정산・언구비 마을을 포함)이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로 개칭되었다. 광복 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동구 언주출장소 관할 아래 논현동이 되고, 1973년 7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780호로 언주출장소가 폐지되고 영동출장소가 신설됨에 따라 논현동도 이의 관할 아래 있었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로 성동구로부터 강남구가 분리 신설될 때 강남구에 편입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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