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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창동 남창동 동명은 조선 선조 때 대동미와 布錢의 출납을 위해 설치된 宣惠廳 창고가 있던 곳의 남쪽에 해당된 데서 유래되었다. 남창동은 조선 초기 한성부 서부 양생방에 속했으며, 영조 때에는 서부 양생방 창동계였고, 1894년 갑오개혁 때 西署 양생방 창동계 창동, 상동계 상동이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로 양생방의 창동 일부와 상동 일부를 병합하여 남미창정이라고 하였으며,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가 실시되면서 중구 남미창정이라 하였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중구 남창동이 되었다. (서울지명사전 발췌) 1. 주요 지역 백범광장 남대문시장 갈치조림골목 남대문시장
2. 남영동 남영동 동명은 서울 남쪽인 이곳에 군영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남영동은 조선시대 말 한성부 남부 둔지방(성외)의 이태원계・전생내계・갈어리계의 일부였으며, 1911년에는 경성부 한지면 원흥동・이태원동이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성부 한강통으로 되었다. 1941년 10월 1일부터 연병정이라 개칭하였고,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실시된 區制度로 용산구 연병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용산구 남영동으로 고쳐 오늘에 이른다. (서울지명사전 발췌) 1. 주요 지역
4. 남산동로 남산동1가 동명은 남산 남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산골이라고 하였던 것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남산동은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명례방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을 보면 한성부 남부 명례방 장악내계에 해당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5부를 5서로 개편하면서 한성부 남서 명례방 남산동계 남산동이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한성부는 경성부로 바뀌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남부 명례방 남산동을 셋으로 분리하여 남산정1・2・3정목이라 하였는데 그 중 서쪽 방면을 남산정1정목으로 하였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區制度가 실시되면서 중구 ..
3. 남대문로 남대문1가 동명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정문인 국보 제1호 숭례문의 별칭인 남대문에서 유래되었다. 남대문로1가는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광통방・호현방・대평방과 중부 장통방・서린방 일원이었다. 그 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한성부 5部가 5署로 개편될 때 중서 서린방 백목전계 백목전후동, 부정동계 부정동, 장통방 정만석계 청포후동, 남서 광통방 다동계 하다동, 미동계 미동, 회현방 소공동계 동현, 명례방 동현계 동현, 대평방 대광교계 광교동・사자청동, 석동계 석동, 소광교계 소광교동이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경기도에 예속 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령 제3호와 경기도고시 제7호로 중부 광교동 부정동 백목전동 청포후동, 남..
1. 남가좌동 남가좌동 동명은 가좌동의 남쪽인 데서 유래되었다. 가좌동은 ‘가재울’이란 자연 마을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것으로, 점차 인구가 늘어나자 가좌1・2계로 나눈 것이 다시 남・북가좌동이 되었다. 즉 이곳에 가재가 있고 산이 둘러쌌으므로 가재울이라고 하던 것이 한자음으로 가좌리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남가좌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성외) 가좌동계 가재울이라 하였다.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북부 연희방(성외) 가좌동1계에 속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北署 연희방(성외) 가좌동1계 가좌동, 망원정계 월사동에 속하였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를 5부 36방으로, 성외를 8면으로 할 때 남가좌동은 경..
1. 길음동 길음동 동명은 기리물골・기리묵골・기레미골이라 불리던 마을 이름을 한자명으로 고쳐 쓴 데서 유래되었다. 기리묵골은 의정부방면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미아리고개의 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의정부 쪽에서는 경사가 완만하고 또 정릉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골짜기가 길게 형성되었다. 따라서 골짜기가 길게 놓여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기리물골・기리묵골・기레미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이를 한자명으로 길음동이라 표기한 것이다. 길음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하였으며,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 의하여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에 속하였다. 1895년 한성부 東署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 미아리로 칭하였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숭신면 미아리로 칭하다가 19..
3. 길동 길동 동명은 마을로부터 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사태 등의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은 길한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일설에는 마을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 하여 붙은 ‘기리울’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길동은 조선시대에 경기 廣州牧에 속하였으며,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 337군으로 개편될 때 한성부 11군 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이듬해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다시 13도 339군으로개정하고 5등으로 구분하였는데, 길동은 경기도 38군 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에 소속되었으며, 1906년 10월 1일 칙령 제48호에 의해 광주부는 광주군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길동은 광주..
1. 금호동 금호동 동명은 옛 지명인 水鐵里의 鐵에서 金, 水에서 湖로 각 글자의 뜻과 통하는 글자를 자의로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예전에 이 마을을 ‘무쇠막’ ‘무시막’ 또는 ‘무수막’이라 하였는데, 한자명으로 水鐵里라고 하였다. ‘무수막’은 조선시대에 무쇠 즉 선철을 녹여 무쇠솥・농구 등을 주조해서 국가에 바치거나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들과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자연 마을인 데서 유래된 지명이었다. 또 한강에 인접한 마을이기 때문에 물마을의 뜻인 물막・무수막・무시막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금호동은 조선 전기 한성부 城底十里에 속하였다.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외) 수철리계에 속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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