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beat Explorer (300) 썸네일형 리스트형 [손자병법] 2. 작전(作戰) 1. 전쟁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손자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하는 원칙은 일반적으로 작고 가벼운 병거 천 채와 크고 무거운 병거 천 채에 군대 십만을 동원하고, 천 리 먼길에 군량과 사료를 실어 날라야 한다. 그러자면 전. 후방의 부대 경비와 列國 사절의 접대비용, 아교풀과 옻칠 같은 기자재 비용, 병거와 회갑 같은 무기 및 장비의 정비 비용 등 날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야 하나니, 이에 대한 대비가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십만의 군대를 출동시킬 수가 있다. 2. 전쟁을 할 때는 신속히 승리해야 한다. 아무튼 군대를 동원해 전쟁을 한다면 무엇보다 신속히 승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전쟁을 오래 끌게 되면 군대는 지치고, 예기는 꺾이어, 적의 城을 공격하더라도 군력만 소진할.. [손자병법] 1. '계'편('計'編) * 計編은 전권을 관통하는 병법이론의 기본관점을 제시, 강령의 역할 담당 - 일부 판본에서는 시계라고도 하는데 '먼저 계책을 세우고 그 다음에 출전한다'는 병가의 통설을 의식 - 計는 동사로 헤아리다, 예측하다는 뜻 - 전쟁 하기 전, 피아간 제반 여건과 조건을 비교 분석, 승부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기본 작전을 수립 - 전쟁에 대한 승패 예측과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 *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는 사전에 반드시 피아에 대한 제반 여건과 요소들을 세심히 따져야 함 - 꼭 군사를 일으켜야 할 당위성이 있는지 없는지 철저히 분석해서 신중히 판단해야 함 *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기본요소로 5事와 7計를 제 -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하고 자세히 살펴야 함 - 손자는 5事 중 道, 7計 중 군주의 有道를 처음으로 꼽.. [손자병법] 0. 개요 전쟁은 낭만이 아니다.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전쟁은 규칙이 없다.무조건 싸움에서도, 싸움 이후에도 살아남아야 한다.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 후 망하는 것 보다 전쟁 후에도 잘 유지하는게 더 중요하다.나도 적도 온전히 남아 있게 해서 이겨야 한다. 치킨게임은 하면 안된다. 싸움은 최후의 수단이다.승부는 싸우기 전에 결정된다.나와 적을 잘 살펴보고, 적의 싸움의지를 꺾고, 그래도 어쩔 수 없을 때 싸운다. 이길 수 있는 공격만 한다.이기는 싸움만 시작하라. 이미 패배한 상대를 대상으로만 싸워야 한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지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싸움은 목숨이 걸린 비싼 활동이다. 적게 싸우고 빠르게 끝내야 한다. 17. 삼각동 삼각동 동명은 이곳의 지형이 서쪽은 넓고 동쪽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삼각형 지형으로 생긴 데서 유래되었다. 삼각동은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大平坊 일부 지역이었으며, 영조 27년(1751)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는 남부 대평방 하홍문계로 되어 있다. 1894년 갑오개혁 뒤 南署 대평방 대광교계 광교동・사자청동, 광교계 동천변동, 홍문동계 홍문동, 곡교계 곡교동, 소광교계 소광교동으로 되었다. 1914년 경성부의 전 지역에 대한 동명의 개편이 있었는데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성부 남부 대광교동・사자청동・소광교동 일부와 홍문동 곡교동을 합쳐 삼각정으로 하였으며,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가 실시되면서 중구 삼각정이 되었다. .. 8. 산천동 산천동 동명은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개정할 때 山手町을 개정한 것이다. 산천동은 1867년에 간행된 ≪육전조례≫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형제정계・탄항계・도화동외계 지역이었으며, 갑오개혁으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한성부 西署 용산방(성외) 형제정계 형제동, 탄항계 탄항, 도화동계 외동 지역이 되었다. 1911년에는 경성부 용산면 탄항・형제정・도화외동이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탄항・형제정・도화외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경성부 山手町으로 칭하였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를 실시하면서 용산구 산수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용산구 산.. 16. 산림동 산림동 동명은 옛 지명인 살리뭇골을 한자명으로 산림동이라고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살리뭇골은 산림과는 관계없는 하천변의 평지에 형성된 자연마을이었다. 산림동은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성명방 지역에 속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뒤 南署 성명방 산림동계 소산림동, 대산림동계 대산림동, 연성위계 연정동・삼대동・후동・석정동 지역이 되었다. 그 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남부 성명방 산림동・후동 각 일부와 삼대동・석중동・연정동을 병합하여 임정이라 하였으며,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가 실시되면서 중구 임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중구 산림동으로 하였다. 이 마을은 1977년 9월.. 4. 사근동 사근동 동명은 이 마을에 사근절〔沙斤寺〕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사근사는 현재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바로 밑에 있었다고 한다. 또 사근동의 ‘沙’자가 모래사자로 모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사근동은 조선 전기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에 속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東署 인창방(성외) 사근리가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성부를 5부 36방, 성외를 8면으로 할 때 경성부 인창면 사근리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사근리가 되었으며,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와 경기도고시 제32호로 경성부 관할구역이 확장될 때 경성부 사근정이 되었다. 1943년 .. 5. 사당동 사당동 동명은 옛날 큰 사당이 있던 마을인 데서 유래되었다. 사당동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사당리였으며,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이 일대 능마을・동산마을・양짓말 등을 병합하여 시흥군 신동면 사당리라 하였다. 광복 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영등포구 사당동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로 영등포구에서 관악구를 분리 신설할 때 관악구에 이속되었고,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구하면서 사당동은 동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서울지명사전 발췌) 1. 주요 지역 국립현충원 총신대학교 이전 1 ··· 3 4 5 6 7 8 9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