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 정문 앞에서 혜화동까지의 지역이다.
명륜동2가는 1936년 4월 1일 숭2동을 유학교육의 유일한 기관인 명륜학원이 있는 동이라 하여 명륜정2정목(明倫町2丁目)으로 명명했던 데서 비롯된다. 명륜동2가는 조선 후기부터 동명이 많은 문헌에 나타나는 만큼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이 많이 있었다.
송동(宋洞)은 명륜동1·2가와 혜화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우암 송시열이 살았던 집 부근의 마을이라해서 붙여졌다. 상토교동(上土橋洞)은 웃흙다리골이라고도 하는데 혜화동과 인접한 21·22번지 일대이다. 혜화동에는 2개의 토교(흙다리)가 잇었는데 2개 중에서 보다 윗쪽에 있는 것을 상토교(上土橋) 혹은 웃흙다리라 하고 이 다리 근방에 형성된 부락을 흙다릿골이라 하였다. 관기교동(觀 橋洞) 혹은 관기교골·관기다릿골·관다리골이라 부르는 곳은 명륜동2가 178∼188번지 일대인데 이곳에서 명륜동4가 183번지를 이어주는 다리가 관기다리이므로 그 이름을 따서 붙여진 동명이다. 이 다리에서 임금의 성균관 거둥시 박석고개를 넘어오는 관기가 보였기 때문에 다리이름을 붙였다. 광례교동(廣禮橋洞)은 광례곳골이라고도 하는데 혜화동사무소가 있는 근방에 광례교가 있었고 이 다리의 주위에 발달한 마을이어서 동명이 붙여졌다. 궁내정동(宮內井洞)은 21번지 일대의 마을인데 경종계비(景宗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의 친정에 큰우물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궁안우물골이라고도 한다. 궁정동(宮井洞)은 궁내 정동 부근의 마을로 궁안골이라고도 불렀다. 박정동(朴井洞)은 박우물골이라고 하며 지금의 창경궁로가 지나는 길 가운데 있었다. 사현사동(四賢祠洞)은 사현삿골이라고 하며 전 고려대 혜화병원이 있던 일대의 마을로 사현사가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산천동(山泉洞)은 성균관대학교 정문 동쪽의 마을인데 산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졌으며 산우물골이라고도 하였다. 정문동(旌門洞)은 127번지에 정문이 있었기 때문이며 정문골이라고도 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하는 등 서울이 텅비게 되어 성균관까지 수모를 입을 지경에 처하자 성균관 유생이었던 정신국(鄭信國)과 박잠미(朴潛美)가 공자(孔子)·증자(曾子)·안자(顔子)·맹자(孟子)·자은(子恩)의 5성(聖)의 위패를 남한산성에 있는 개원사(開院寺)로 옮겨 난을 피하게 하였다. 이에 나라에서 이들 두사람에게 정문을 내리고 사당을 세워 호성사(扈聖詞)라 하였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피마동(避馬洞)은 피맛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성균관 동쪽으로 명륜동1가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할 때 호위하는 군관들은 임금이 성균관에 들어간 후 말을 이곳에 매어두고 기다렸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명륜동2가의 서쪽 끝으로 성균관길, 남동족으로 창경궁로가 지나고 있는 동으로서, 한 때 성균관대학생과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집단 하숙촌이 되었다. 그러나 1972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자리를 옮겼고 학생들도 보다 하숙비가 싼 변두리 동네로 옮겨 자취를 하거나 지방학생 기숙사가 곳곳에 마련되면서 간신히 대학가 하숙촌의 맥을 이어갈 뿐이다.
명륜동2가를 지나는 창경궁로는 종로4가에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폭 25m, 연장 1,750m인데 창경궁에 동·식물원이 모두 있을 때 해마다 4월이면 창경원 벚꽃구경을 하려는 상춘객(賞春客)으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던 길이다. 1968년 11월 서울의 전차궤도가 철거되기 전에는 을지로4가에서 돈암동까지 전차가 운행되던 길이기도 하다. 1988년부터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도로 양옆의 건물을 철거, 새단장을 한 곳이다.
명륜동2가는 북으로 명륜동1가와 동으로는 혜화동, 남쪽은 명륜동4가, 서쪽으로는 명륜동3가를 둘러 싸여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사현사 터
어유귀 집터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혜화병원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