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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1. 종로구

25. 명륜3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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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를 포함함 지역이다.

명륜동3가는 1936년 4월 1일 숭3동이었던 이곳의 동명을 유학교육의 유일한 기관인 명륜학원이 있는 동이라 하여 명륜정3정목(明倫町3丁目)으로 명명했던 데서 비롯된다.
명륜동3가는 성균관이 위치했던 관계로 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자연부락명이 많았다.

관동(館洞)은 성균관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관사람말이라고도 하였다. 관사람은 성균관에 모신 4성(聖) 10철(哲) 6현(賢)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고려 말의 유학자 회헌(晦軒) 안유(安裕)가 노비 100명을 개성의 성균관에 바치면서 비롯되는데 이들의 일부가 한양의 성균관 주변에 자리잡으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이룬 마을이며 주민이며 안씨노비촌이라고도 하였다. 안씨의 노비자손이 번창하자 이 마을에는 순홍안씨의 노비문서 없이는 들어가서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비록 노비신분이나 성현을 모시므로 긍지도 대단하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유생들도 신분상으로는 노비인 이들에게 「하오」「하게」등의 존대를 썼을 정도였으며 성균관 유생들 대부분이 이 관사람의 집에 기숙하였으므로 노비였지만 위세가 당당하였다. 도의정치에 어긋난 일을 할 때 성균관 유생들은 왕궁앞에서 집단데모인 권당(捲堂)을 하면 관사람들은 이들의 밥을 나르느라 온 마을이 텅비기도 하였다. 관동 노비들의 구심행사(求心行事)는 9월 20일로 이 날은 상전이었던 안유의 기일(忌日)로 각기 쌀과 베를 추렴하고 성균관에서도 돈과 쌀을 보조하여 제사를 성대하게 치루도록 하였다. 성균관 제사의 제수 장만에 필요한 희생(犧牲)은 관동사람들의 특혜였다. 제사에는 신(神)과 공식(共食)하는 뜻에서 희생을 가지고 국을 끓여 제사에 참석한 사람이 고루 나누어 먹는데 농사신(農事神)인 신농(神農)에게 풍년을 빌며 소를 바친 후 먹는 음식이 선농탕(先農湯)이었다. 따라서 이 선농탕을 관동 노비들이 직접 끓여 여염집을 상대로 팔기 시작했으므로 한말까지 이 관동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수음식이 선농탕(설렁탕)이었다.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고도 하므로 성균관 동쪽 마을은 동반동(洞泮洞) 혹은 동반골이라 하고 서쪽 마을은 서반동(西泮洞) 혹은 서반골이라 하였다.

영동(營洞)은 영문골·영문동(營門洞)이라고도 하는데 창경궁 월근문(月覲門) 동북쪽의 마을이다. 별대영문(別隊營門)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성균관의 이문(里門) 안쪽에 있는 마을을 이문동(里門洞)·이문안, 홍문(紅門)이 있는 마을은 홍문동(紅門洞)이라 했는데 홍문선골에서 홍문섯골로 바뀌었다. 또 성균관 앞에 있던 다리는 반교(泮橋)·반수교(泮水橋)라 하였고 탕평비각(蕩平碑閣)앞에 있는 다리는 비각다리라 하였다.

명륜동3가는 우리나라 교육기관의 모태가 되는 성균관이 있던 곳으로 동의 서쪽과 북쪽은 임야로, 동쪽과 서남쪽은 전형적인 주택지구로 되어 있으며 전체 동면적이 1/3을 성균관대학교가 차지하고 있다.

동의 북쪽은 성북구 성북동, 동쪽은 명륜동1가, 남쪽은 명륜동4가, 와룡동, 서쪽은 원서동과 삼청동으로 싸여 있으며 조리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문묘

성균관

관성묘

명륜동 김종국가

마해성 집터

생사당터

성균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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