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에서 독립문 가는 교남동 동쪽지역이다.
홍파동의 동명은 홍문동과 파발동의 첫글자를 각각 따서 붙여졌다.
홍파동은 천변동(川邊洞)·어수정동(御水井洞)·신촌동(新村洞)·월암동(月岩洞)·파발동(把撥洞)·홍문동(紅門洞)의 자연부락이 합쳐져 형성되었는데, 천변동은 개천께라고도 하며 교남동과의 접경부분이 된다. 교남동과 홍파동의 경계지점에 작은 내가 흘렀으므로 내의 좌우측에 있는 부락을 천변동이라 하였다. 어수정동은 어수우물골이라고도 한다.
행촌동 대신중고등학교 부근 지금의 사직로가 지나는 남쪽 끝에 어수우물이 있었으므로 그 마을을 어수우물골이라 하였다. 신촌동은 교북동 11번지 일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연변에 있는 홍파동 56번지 일대에 새말 혹은 신촌동이라 하였다. 월암동은 송월동과 접경지점인 홍파동 158번지 쯤에 워령바위가 있었으므로 워령바위골 혹은 월암동이라 한다.
파발동은 홍파동과 교북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홍파동 52·56번지, 교북동35·50~52번지가 된다. 파발마가 있는 역참(驛站)이 있었기 때문에 파발골 혹은 파발동이라 한다. 신라 때부터 있었던 우역제도(郵驛制度)의 하나인 파발은 조선 선조 30년(1597)에 통신수송기능에서 통신기능만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기발(騎撥)과 보발(步撥)을 두어 기발은 25리마다, 보발은 30리마다 1참(站)을 두었다. 파발동은 근방에 농민들의 말을 징발하기 위해 세운 고마청(雇馬廳)이 있었는데 고마청은 아마도 기발의 역참이 아닌가 한다.
홍문동은 독립문 동쪽 행촌동에 있던 돈대인 연향대(燕享臺) 아래에 있던 마을로 효자의 정문(旌門)이 있었으므로 홍문동 혹은 홍문골이라 하였다. 홍문골 끝 지형이 오목한 곳에 있던 우물은 볼우물이라 하였고 행촌동에서 사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행촌동 37번지 아래인 홍파동 42번지 부근 일대를 삼형제고개라 한다. 지금은 사직터널과 성산로로 이어진 넓은 자동차길이지만 사직터널이 소통되기 전에는 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고개에서 주막을 경영하던 삼형제는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나라에서 정문울 세워 주었다.
홍지동 일원과 신촌, 어수정동, 천변동 등에서는 속칭 모화관삼국지 또는 엿방맹이골이라 하여 투전쪽장수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서 오래전부터 서민의 거주지역이었으며 특히 수공업 지역으로서 등물제조업과 투전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각종 판매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현재의 홍파동은 북으로 행촌동, 동쪽으로 사직동, 송월동, 남쪽으로 교남동 서쪽으로 교북동으로 둘러쌓였으며 우리나라 지도같은 땅 형태를 이루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문성묘지
베델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