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동성고와 서울과학고 사이 지역이다.
혜화동은 성북구 삼선동과의 경계지점이 되는 고개에 도성(都城) 8문(門)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의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혜화동으로 편입된 옛 지명들은 오랜 옛날부터 불리어 온 자연부락 명칭들로 혜화동의 옛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상백동(上栢洞)은 혜화동과 동숭동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태종 때 박은(朴 )이 낙산(駱山)아래 이 곳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栢林亭)을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웃잣골로도 불렀다. 상토교(上土橋)는 혜화동과 명륜동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혜화동 132번지에 있던 흙다리 위쪽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웃흙다릿골, 줄여서 웃흙다리로도 부른다.
송동(宋洞)은 혜화동과 명륜1가, 명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효종 때의 유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토교(下土橋)는 흙다리 아래쪽에 있던 마을이므로 아래흙다릿골, 줄여서 아래흙다리 또는 한자로 하토교라 하였다.
혜화동의 동명이 유래된 도성 4문 중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는 겸제(謙齊) 정선(鄭 )의 「동소문(東小門)」(견본담채 17.5×13.5㎝ 고려대학교 박물관소장)이 있다. 지금 명륜동 큰길로 꺽어지는 창경궁 모퉁이쪽 언덕 위에서 혜화문을 바라본 모습인데 원래는 지금의 서울의대 뒤편과 창경궁의 동편 산줄기가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을 일제 때 새길을 내면서 현재와 같이 산언덕을 끊어낸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양 언덕의 높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수승이 가는 위치에서 바라본 각도이다.
지금의 동성중고등학교와 천주교 혜화동 성당이 들어서 있는 백자동일대의 산아래 동네에는 큰기와 집들이 즐비하고 소나무숲이 우거진 낙산줄기는 흰 구름이 휘감아 돌고 있다. 동소문은 원래 여진족(女眞族)의 도성 출입 전용문이었으므로 조선 초에는 상당한 규모의 문루(門樓)가 있어 위용을 과시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淸)을 건국한 여진족이 예전 명나라 사신이 드나들던 서대문으로 출입하면서부터 문의 관리를 소홀히 하여 문루가 없어지고 암문(暗門)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동소문 밖 돈암현(미아리 고개)이 원래는 적유현(狄踰峴) 곧 되넘이고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동소문은 여진족 전용 출입문이라는 기록과 부합된다. 영조 때 중수하면서 걸었던 문액(門額)은 당시의 명필인 조강이(趙江履, 1697∼1756)의 글씨이다.
혜화동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인근 명륜동에 옛 국립대학격인 성균관(成均館)이 위치하여 옛부터 이 일대가 유학교육(儒學敎育)이 성했던 지역이었던 것과 관련하여 역사가 오랜 교육기관들이 많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톨릭대학을 비롯해서 경신고교, 동성고교, 혜화여고, 서울과학고교 등이 들어서 옛 교육 중심지로서의 맥을 잇고 있다.
혜화동은 종로구의 동북단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성북구 성북동, 동쪽은 삼선동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동숭동, 명륜동4가와 서쪽에 명륜동1·2가에 각각 접해 있다. 동의 남쪽과 북쪽 양 끝 지역에 카톨릭대학, 동성중고교, 과학고교, 경신고교 등이 집중된 교육지역이며 창경궁로와 대학로가 혜화동로터리에서 합쳐져 서울의 동북 간선도로인 동소문로를 형성하고 있다. 성북구와 경제점인 동의 북쪽은 북악산 자리 끝에 위치하여 비교적 완만한 경사도를 이루고 있으며 고개길로 혜화문이 있던 동소문로는 1939년경에 전차궤도가 부설되면서 도로가 확장되고 턱도 낮아졌으며 창경궁로와 미아로 확장공사에 따라 1988년부터는 더욱 노폭이 넓어졌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김상협가
홍화문터
흥덕사
혜화동성당
카톨릭대학
보성중고등학교터
동신중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