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길 건너편, 예전 풍문여고가 있던 지역이다.
송현동은 솔고래(松峴)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송현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송현은 솔고개솔재라고도 부르는데 지금의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미대사관저 사이에 있던 고개로 소나우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므로 송현이라 불렀다. 이에 대하여는 『태조실록(太祖實錄)』7년 4월 임진조(壬辰條)에도 「경복궁 좌강(左岡)의 송(松)이 고(枯)하여서 근강인가를 철할 것을 명하였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경복궁 좌강'이란 송현과 그 내맥(來脈)의 소나우가 고고(枯槁)하므로 근처의 인가를 철거케 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곳에는 조선 초 무렵에 송목이 많았고 그 송목은 국가에서 보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송목의 보호는 물론 산맥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였을 것이다.
또한 조선 초의 소위 '정도전(鄭道傳)의 난'을 들 수 있는 바 태조실록 7년 8월 기사조에 의하면 정도전·남합(南闔)·심효생(沈孝生) 등이 송현에 있는 남합처가에서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할 모의를 하다가 정안군(靖安君 : 태종) 당의 습격을 받아 복주(伏誅)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 초부터 있었던 송현이란 지명은 조선후기에는 영조 때의 도성지도에서 표시되고 있으며, 일제 강점 초기까지도 그 현의 이름이 칭용되다가 지금은 동명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수송동과 송현동 사이 송현으로 이어지는 곳의 고개는 비가 오면 질퍽하여 걷기가 힘들어서 박석(石)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박석고개, 박석현이라 불렀고, 덕성여중고가 있는 부근의 우물은 깊어서 두레박을 고리에 매달아 물을 퍼올렸으므로 고리우물이라 하였고 인근의 부락을 고리우믈골, 한자로 고리정동(古里井洞)이라 하였다.
현재의 송현동은 북으로 소격동, 동으로 안국동, 남쪽으로는 율곡로를 사이에 두고 중학동과 수송동, 서쪽을 사간동이 둘러싸고 있는 종(鐘)모양으로 생긴 지형이다. 광복과 함께 이 땅에 진주한 동서 양대 세력의 상징이 된 미대사관저(美大使館邸)가 동 면적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