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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3. 동대문구

4. 이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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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 서쪽지역이다.

이문동은 조선시대 이곳에 오늘날의 방범초소 역할을 했던 이문(里門)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문이란 성문이나 일반가옥의 대문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으로, 큰 가로에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골목길 또는 큰길로 이어지는 작은 길 어귀에 마을문으로 설치된 것이다. 이문의 기원은 고대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던 것이나 조선시대의 이문은 국가적 방범시책으로서 세조년간에 처음 한성에 설치함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세조 11년(1465) 11월 8일 임금이 한성부에 이문을 설치하라고 명령하였고, 3개월 후인 12년 2월에 병조에서 보고하기를 " 경중의 이문에 숙직할 인원은 이문내의 사람으로 정했으며, 외방에도 이문을 설치했습니다. 경중의 이문내에 10호 이하는 매일밤 2인, 20호 이하는 3인, 30호 이하는 4인, 30호 이상은 5인을 동원하여 교대로 순찰케 하고 순관과 병조에서 수시로 감독하며, 이문과 가까운 곳에 인접해 있는 경수소는 곧 폐지하고, 외방에서는 수령이 민가가 조밀한 곳을 택하여 이문을 설치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고 세조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와 같이 이문은 마을 규모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게 위하여 순찰조를 운영하는 제도였으며, 마을의 도적을 방지하는 관청조직의 일선업무를 주민 스스로 행하는 자율방범 제도였다. 즉, 관설의 치안제도가 아니라 순전히 주민들에 의해 설치되고 관리되었던 주민의 자치치안제였다. 도적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당시 시행하였던 제도는 ① 밀고함을 설치하여 의금부의 낭청이나 도성사문을 지키는 오원이 매일 저녁 승정원에 보고케 하는 것 ② 호패제도 부활 ③ 경수제도의 시행(경수소는 한성부 치안업무의 말단기관으로 이미 세종 이전에 설치되었다. 세조때 도성내에 87개소, 도성외에 19개소가 있었으며, 도성내의 모든 경수소에는 보병 2명이 부근 방리인 5명을 거느리고 활, 칼, 창 등의 무기를 가지고 숙직하였다.) 등이었는데, 이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도적예방책이었으며 반면에 이문은 순수 민간운영의 치안제도였던 것이다. 한편 이문이 설치된지 불과 6년이 지나 숙직이 이루어지지 않고 무너지기도 하는 실정이 야기되었다. 성종의 노력으로 다시 운영되기도 하였으나 연산군을 거쳐 중종, 명종에 이르러서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 때는 이문을 창설한 후 약 100년이 경과된 시점으로 그 동안 이문은 한성부 민생치안을 담당하였으나 점차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숙직을 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나는가 하면 이문이 노후하여 파괴되고 무너져서 존재가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문은 임란후 대부분 소실됨으로써 그 본래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으며, 영조때 그 존재의 기록이 보일 뿐 순조, 헌종 때에는 그 존재를 감추기 시작했다. 즉 조선후기에는 이문의 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동대문구 이문동, 도봉구 쌍문동, 중구 쌍림동의 옛이름인 쌍리문동 등 이문에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어 후세에 이문의 존재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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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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