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과 종로5가역 사이 지역이다.
충신동의 동명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동의 서북쪽에 조선시대 유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있고, 동쪽으로는 4부학당의 하나인 동학(東學)이 있었기 때문에 유학이 성하던 곳이라 하여 유학의 8대 강목인 인의예지충신(仁義禮智忠信)을 각 두글자씩으로 한 동명을 만들었다는 설과 1914년 경성부의 동명 제정 때 방명(坊名)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충신의 일부 지역이 조선시대 숭신방(崇信坊)에 해당되므로 「숭」의미가 비슷한 「충」을 써서 충신동이 되었다는 설이다.
효제동과 충신동의 경계가 되는 도로는 대학천을 복개하여 만들었다. 이 때문에 충신동에는 여러개의 다리가 놓였으며 이와 관련된 지명이 많았다. 충신동 214번지와 종로6가 238번지, 효제동 164번지를 이어주는 곳에는 방아다리가 있었다. 이곳의 지형이 디딜방아의 다리처럼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로는 저교(杵橋)라 하고 충신동가 효제동의 이름을 따서 충효교(忠孝橋)라고도 하였다. 충신동 104번지와 효제동 108번지 사이에 놓인 다리는 새로 다리를 만들었기에 새다리·신교(新橋)라 불렀는데 나무를 걸치고 그 위에 흙을 덮었기 때문에 흙다리 혹은 토교(土橋)라 하였다.
이화동 220번지와 충신동 80~100번지 사이에 있는 마을은 옹달우물골이라 하였는데 오목한 곳에서 물이 샘솟아 나와 인근 사람들의 식수로 썼기 때문에 옹달우물이라 하고 주변의 마을은 옹달우물골이라 하였다.
율곡로변으로 이화동과 경계가 되는 충신동 7통 일대는 장원동(長垣洞) 혹은 진담골이라 하였다. 이화동 27~28번지에 조선시대 공신(功臣)의 초상화와 관재(棺材)인 동원비기(東園秘器)를 관리하던 장생전(長生殿)이 있었고 장생전의 담이 길게 쳐져있었기 때문에 부근의 마을은 긴담골이 되었다가 다시 진담골로 변하였다.
충신동은 동쪽으로 창신동, 남쪽에 종로6가, 서쪽은 효제동이 있으며 북쪽은 이화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한가운데를 율곡로가 지나면서 동서로 양분하고 있으며 낙산 남쪽 기슭의 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광복과 6.25동란으로 월남민들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임야와 전답으로 되어 있던 충신동 일대가 주택지로 변하였기 때문에 율곡로를 기준으로 한 동쪽지역은 비교적 택지 정리가 복잡하게 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지금의 충신동 지역은 대부분 서민층의 주택가이며 율곡로·대학로 주변에는 소규모 상가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충신동은 종로구의 다른 동과 마찬가지로 동세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 지역이다. 충신동에는 율곡로가 동의 중앙부를 관통하면서 대학로와 종로6가 동대문 방향과 연결시켜 주고 있고, 그 밑으로는 지하철 4호선이 지나가 이 지역의 교통을 더욱 편하게 해주고 있다. 충신동에 있는 관공서로는 효제파출소가 충신동 105-1번지에 유일하게 위치하고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 지역
김효원 집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