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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여동 거여동 동명은 조선시대의 巨余味洞・巨余未洞이 변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이 지역에 巨岩이라는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김이・겜리라 하였는데,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 때 잔버드리・개롱리・뒷말을 병합하여 巨餘里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거여동은 조선시대에 경기 廣州郡 中垈面의 일부였으며,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이 일대 잔버드리・개롱리・뒷말을 병합하여 광주군 中垈面 巨餘里가 되었다. 광복 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거여동이 되었으며, 성동구의 관할이 되었다. 그 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로 ..
2. 개화동 개화동 동명은 이 동의 면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산의 형태가 꽃이 핀 모양인 높이 132m의 개화산이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개화동은 조선 초기까지 陽川縣 지역이었으나 곧 衿川郡으로 되었으며, 인조 때 陽川郡으로 잠시 승격되었다가 숙종 때 다시 양천현이 되었다.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로 실시된 23부제에 의해 仁川府 陽川郡 三井面이 되었으며, 이듬해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해 실시된 13도제에 의해 다시 경기도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양천군은 金浦郡・通津郡과 합하여 金浦郡이 되었고, 양천군 삼정면의 內浮石里・相思洞・外浮石里・開花里 등의 마을을 합하여 金浦郡 陽西面 開花里로 칭하였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
1. 개포동 개포동 동명은 이 지역이 양재천 갯벌에 있으므로 개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 또는 한자명으로 開浦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 개포동은 1962년까지 盤浦里라 불렸는데, 지금 대치동 미도아파트 일대에 소반같이 생긴 浦口가 있어 소반 ‘盤’자를 따서 ‘盤浦里’라고 하였다. 그러나 1963년 1월 1일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현 서초구 반포동과의 동명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개포동으로 개칭한 것이다. 개포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廣州郡 彦州面 浦一洞・盤谷洞 일부였으며,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가 되었다. 광복 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기도 지역의 12..
2. 개봉동 개봉동 동명은 경인선과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남쪽에 있었던 개웅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는데, 開雄의 ‘開’자와 양천구 신정동과 경계를 이루는 골봉재의 ‘峰’자를 합성한 것이다. 개봉동은 조선시대에는 富平都護府 葛灘이었으며,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로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 337군으로 개편될 때 仁川府 富平郡 水呑面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 다시 경기도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부평군과 인천군(府內面과 多所面을 인천부로 하고 남은 지역)을 합하여 富川郡이 되었고, 부평군 水呑面 開峰里는 부천군 桂南面 開峰里로 칭하였다. 193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05호에 의해 계남면이 素..
1. 강일동 하남시와 경계에 있는 지역이다. 원래 상일동과 하일동의 사이를 흐르는 게내〔蟹川〕의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하일동으로 불렀던 곳이다. 하일동은 조선시대에 경기 광주목에 속하였으며,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 337군으로 개편될 때 한성부 11군 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이듬해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다시 13도 339군으로 개정하고 5등으로 구분하였는데, 하일동은 경기도 38군 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에 소속되었으며, 1906년 10월 1일 칙령 제48호에 의해 광주부는 광주군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하일동은 광주군 龜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1. 갈현동 연신내역, 구산역, 은평성모병원, 서오릉 사이의 지역이다. 갈현동 동명은 옛날 이 일대에 칡뿌리가 많아서 갓을 만드는 원료가 되어 왔기 때문에 ‘칡고개’ ‘갈고개’ ‘가루게’라 불렀으며 한자명으로 葛峴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갈현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城底十里에 해당하였다.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북부 延恩坊 葛古介契에 속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北署 연은방(성외) 갈현계 宮洞・坐月洞・孝敬洞・薄石洞이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를 5부 36방으로, 성외를 8면으로 할 때 경성부 은평면 갈현・궁동・좌월동・효경동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기..
1. 갈월동 갈월동 동명은 부근에 칡이 많았기 때문에 유래되었으며, 혹은 葛月道士가 살았다고 하는 것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한다. 갈월동은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갑오개혁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한성부 南署 屯芝坊(城外) 葛月里契 葛月里洞이었다. 1911년에는 경성부 漢芝面 葛月里가 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성부의 구역과 명칭을 변경할 때 전의 갈월리를 나누어 그 일부를 岡崎町으로 하고 일부는 典牲洞과 합하여 三坂通으로 하였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를 실시할 때 용산구 강기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용산구 갈월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서울지명사전 발췌) 1. ..
1. 가양동 가양동 동명 유래는 加麻洞의 ‘加’자와 古陽里의 ‘陽’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가양동은 조선 초기까지 陽川縣 지역이었으나 곧 衿川郡으로 되었으며, 인조 때에 양천군으로 잠시 승격하였다가 숙종 때 다시 양천현이 되었다.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실시된 23부제에 의해 인천부 양천군 郡內面이 되었으며, 이듬해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실시된 13도제에 의해 다시 경기도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양천군은 金浦郡・通津郡과 합하여 김포군이 되었고, 양천군 군내면의 鄕校洞・古陽里・加麻洞・城才井里・孔岩里와 南山面의 登村里・鹽倉里 각 일부를 합하여 김포군 陽東面 加陽里로 칭하였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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