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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길동 길동 동명은 마을로부터 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사태 등의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은 길한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일설에는 마을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 하여 붙은 ‘기리울’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길동은 조선시대에 경기 廣州牧에 속하였으며,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 337군으로 개편될 때 한성부 11군 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이듬해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다시 13도 339군으로개정하고 5등으로 구분하였는데, 길동은 경기도 38군 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에 소속되었으며, 1906년 10월 1일 칙령 제48호에 의해 광주부는 광주군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길동은 광주..
1. 금호동 금호동 동명은 옛 지명인 水鐵里의 鐵에서 金, 水에서 湖로 각 글자의 뜻과 통하는 글자를 자의로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예전에 이 마을을 ‘무쇠막’ ‘무시막’ 또는 ‘무수막’이라 하였는데, 한자명으로 水鐵里라고 하였다. ‘무수막’은 조선시대에 무쇠 즉 선철을 녹여 무쇠솥・농구 등을 주조해서 국가에 바치거나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들과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자연 마을인 데서 유래된 지명이었다. 또 한강에 인접한 마을이기 때문에 물마을의 뜻인 물막・무수막・무시막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금호동은 조선 전기 한성부 城底十里에 속하였다.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외) 수철리계에 속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 궁동 궁동 동명은 조선 선조의 일곱 번째 딸 貞善翁主가 이곳에 살던 吉城君 權大任에게 출가하여 궁궐 같은 큰집에서 살았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궁동은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 水呑面 宮里였으며,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 337군으로 개편될 때 인천부 부평군 수탄면이 되었다. 이듬해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다시 13도로 나눌 때 다시 경기도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부평군이 인천군(府內面과 多所面을 인천부로 하고 남은 지역)과 합하여 부천군이 되고, 부평군 수탄면 궁리를 부천군 계남면 궁리로 칭하였다. 193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05호로 계남면이 소사면으로 바뀌었고, 1941년 10월 1일 ..
3. 군자동 군자동 동명은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둥하다가 마침 이곳 동2로 변(전 남일농장 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다는 전설에 따라 임금의 아들을 낳은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지금도 이곳을 ‘명려궁터’라고 부른다. 군자동은 조선시대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해 있다가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南署 두모방(성외) 전곶계가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성부를 5부 36방, 성외를 8면으로 할 때 경성부 두모면 장내능동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군자리가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동구 군자..
2. 구의동 구의동 동명은 아차산 기슭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긴 지형을 지닌 곳으로 조선시대 양주군 고양주면의 자연마을인 九井洞의 ‘九’자와 山宜洞의 ‘宜’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구의동은 조선시대 경기 양주군 고양주면 구정동・산의동・율동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구의리가 되어, 양주군 고양주면 구정동・산의동・율동과 경성부 두모방(성외) 전곶계 능동・율동 일부를 편입하였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성동구 구의리가 되었으며, 뚝도출장소에서 행정을 맡아보았다. 1950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에 의해 구의리는 구의동이 되었다. 1995년 3월 1일 법률 제4802호에 의해 성동구 중 동2로 이동지역을..
2. 구수동 구수동 동명은 水鐵里에서 유래되었다. 수철이란 이름은 현 新水洞에 무쇠솥과 농기구 등을 만들던 공장이 있어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 부른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에서 비롯된 구수철리를 후에 신수동과 구별해서 구수동이라 하였다. 구수동은 조선 전기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처음으로 한성부 관할이 되어 서부 서강방(성외) 舊水鐵里契라 하고,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도 같은 이름이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西署 서강방(성외) 구수철리계 구수철리가 되었다. 1911년 4월 1일에는 경기도령 제3호에 따라 경성부 서강면 구수철리가 되었다. 1914년 4월 ..
2. 구산동 구산동 동명은 이 마을 건너편 산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산에 거북받침의 ‘인조별서유기비’가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구산동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에 해당하였다.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 私契에 속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北署 연은방 사계 노지동・구산동이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를 5부 36방으로, 성외를 8면으로 개정할 때 경성부 은평면 노지동・구산동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산리가 되면서 현재의 구산동 범위가 형성되었다.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로 서울시에 편입되어 서대문..
4. 구로동 구로동 동명은 옛날 이곳에서 노인 아홉 사람이 오랫동안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중국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白居易가 洛陽 龍門山 동쪽에 石樓를 짓고 시인 8명과 함께 시회인 ‘香山九老會’를 만들어 즐긴 것을 아름답게 여긴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구로동은 조선 초기까지 경기도 금천현 지역이었으며, 정조 19년(1795) 시흥현으로 바뀌어 상북면에 속하였다.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로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 337군으로 개편될 때 인천부 시흥군 상북면이 되었으며, 이듬해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다시 13도로 나눌 때 다시 경기도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시흥군은 과천군과 안산군을 합하여 시흥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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