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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beat Explorer/6. 용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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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산천동 산천동 동명은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개정할 때 山手町을 개정한 것이다. 산천동은 1867년에 간행된 ≪육전조례≫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형제정계・탄항계・도화동외계 지역이었으며, 갑오개혁으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한성부 西署 용산방(성외) 형제정계 형제동, 탄항계 탄항, 도화동계 외동 지역이 되었다. 1911년에는 경성부 용산면 탄항・형제정・도화외동이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탄항・형제정・도화외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경성부 山手町으로 칭하였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를 실시하면서 용산구 산수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용산구 산..
7. 보광동 보광동 동명은 신라 진흥왕 때의 普光國師가 세운 사찰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보광동은 조선 전기에는 한성부 남부 성외 지역이었으며, 조선 중기에는 한성부 남부 한강방(성외) 지역이었다. 갑오개혁으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한성부 南署 한강방(성외) 주성리계 보광리동이었으며,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성부 한지면 보광리가 되었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로 칭하였으며,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와 경기도고시 제32호에 의한 경성부 관할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 보광정이 되었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를 실시하면서 용산구 보광..
6. 문배동 문배동 동명은 현재 신계동에 있는 문배산의 이름을 따서 붙인 데서 유래되었다. 문배동은 17세기 중엽까지는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여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지역이었으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청파4계・청파5계로 칭하였다. 1867년에 간행된 ≪육전조례≫에는 서부 용산방(성외) 청파4계로 되었으며,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한 갑오개혁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한성부 西署 용산방(성외) 청파상4계와 사거리계로 되었다. 1911년에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용산면 청파4계로 칭하였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로 청파4계 일부를 경성부 경정으로 바꾸었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
5. 동자동 동자동 동명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정리할 때 생겼으므로 서계동의 대칭으로 동쪽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동자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성외 지역이었으며, 1867년에 간행된 ≪육전조례≫에는 서부 반석방(성외) 도저동계*석교계*연지계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행정구역 명칭과 구역을 정할 때 경성부 서부 동자동의 도동*신촌동*주교*석교동*한지면의 갈월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고시정이라 칭하였다. 1914년 9월 27일 경성부조례 제8호로 동*서*북부 및 용산의 4개 출장소가 설치될 때 동자동에 해당하는 고시정은 서부출장소 관할로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 區制度를 실시함에 따라 중구 고시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
4. 동빙고동 동빙고동 동명은 조선시대에 국가의 여러 제향에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하는 東氷庫가 있던 것에서 유래되었는데, 현재의 동빙고동은 서빙고동의 동쪽에 위치한 데서 유래되었다. 동빙고동은 조선 전기에 한성부 남부 성외 지역이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론≫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둔지방(성외) 서빙고2계라 칭하였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南署 둔지방(성외) 서빙고2계의 서빙고동으로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동빙고리로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와 경기도고시 제32호로 경성부 동빙고정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가 ..
3. 도원동 도원동 동명은 이곳에 복숭아나무가 많이 있어 桃山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되었다. 도원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였으며, 효창동과 함께 조선 중기에 용산방에 속하였는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용산방(성외) 만리창계 지역이었다.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한 갑오개혁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한성부 西署 용산방(성외) 만리창계에 속하였고, 1911년 4월 1일에는 경성부 용산면 만리창이 되었다. 1914년 3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용산면 만리창 일부를 미생정이라 칭하였으며,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실시된 區制度에 따라 용산구 미생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
2. 남영동 남영동 동명은 서울 남쪽인 이곳에 군영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남영동은 조선시대 말 한성부 남부 둔지방(성외)의 이태원계・전생내계・갈어리계의 일부였으며, 1911년에는 경성부 한지면 원흥동・이태원동이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성부 한강통으로 되었다. 1941년 10월 1일부터 연병정이라 개칭하였고,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실시된 區制度로 용산구 연병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용산구 남영동으로 고쳐 오늘에 이른다. (서울지명사전 발췌) 1. 주요 지역
1. 갈월동 갈월동 동명은 부근에 칡이 많았기 때문에 유래되었으며, 혹은 葛月道士가 살았다고 하는 것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한다. 갈월동은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갑오개혁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한성부 南署 屯芝坊(城外) 葛月里契 葛月里洞이었다. 1911년에는 경성부 漢芝面 葛月里가 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성부의 구역과 명칭을 변경할 때 전의 갈월리를 나누어 그 일부를 岡崎町으로 하고 일부는 典牲洞과 합하여 三坂通으로 하였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를 실시할 때 용산구 강기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용산구 갈월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서울지명사전 발췌)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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