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역에서 피아노 거리를 아우르는 블록으로 번화가를 말할 때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관철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중부 장통방의 청포후동, 혁전후동, 염동, 동곡, 입동의 각 일부와 장교동, 관자동, 정자동을 병합하여 관자동(貫子洞)의 「관」자와 철물교(鐵物橋) 「철」자를 합하여 관철동이라 하였다.
관철동의 동명을 가져오게 한 관자동(貫子洞)은 금·옥·뿔·뼈로 망건 당줄을 꿰는 고리인 관자를 파는 전이 있어 관잣골 또는 한자명으로 관자동이라 하였다. 또 철물교(鐵物橋)는 종로2가 30번지 동남쪽에 있던 다리로 계동, 재동 방면의 물이 관훈동, 인사동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서 장통교(長通橋) 아래로 흘러 들어가는 중간으로 지금의 종로2가를 건너는 다리인데 통운교(通雲橋)라고도 하였다. 주변에 철물전(鐵物廛)이 많았기 때문에 철물전교 또는 철물교, 줄여서 철교라고도 하였다. 이는 영조 때에 발행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일명 漢城圖)를 비롯하여 여러 고지도에도 모두 속명인 鐵物橋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순조 연간에 만들어진 『한경지략(漢京識略) 』에도 계생동의 여러 개천물이 흘러 통운교를 지나 영풍교(永豊橋)에 이어진다.
····통운교는 대사동 입구에 있는데 홍석교(虹石橋)로 지금은 철물교라 일컫는다.
고 하여 청운교(淸雲橋)에서 통운교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대동지지(大東地志)』로 변했는데 다시 철물교라 바뀌어지게 되었다.
관철동은 철계천이 동의 남변(南邊)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옛부터 크고 작은 여러 다리로 청계천을 건넜다. 철물교 이외에도 관철동 11번지와 중구 장교동 51번지 사이에 놓인 다리는 장찻골다리 혹은 장통교(長通橋)·장교(長橋)·장창교(長倉橋)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다리의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을해개조(乙亥改造)」의 여덟글자를 새겨 놓았다.
철물교와 장교는 모두 석교(石橋)이나 토교(土橋)목교(木橋)의 형태로 곳곳에 놓여졌던 다리는 장마로 개천물이 불어나거나 일시적인 폭우로 인하여 유실되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또 제대로 보수 관리하지 못하여 붕괴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1958년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이들 교량이 설치되었던 곳은 모두 아스콘포장으로 되어버렸으므로 그 정확한 위치를 고증할 수 없음이 아쉽다.
관철동에는 시전(市廛)과 관련된 자연부락명이 많이 남았다. 갓전골·관잣골·소금전골·신전뒷골·청포뒷골 등이 그것이다. 그외에도 골목이 괭이처럼 생겼다 하여 괭잇골, 미친 아기씨가 살았으므로 붙여진 동명인 미친아기씻골, 골목 모양이 "丁"자로 되었으므로 정자골 혹은 정자동(丁字洞)이라 하였으며 장통교 북쪽에는 골목이 매우 길었다 하여 붙여진 장찻골·장교동(長橋洞)이 있다. 또 관철동과 종로2가에 걸쳐 있는 마을로 거리가 몹시 더러워서 똥골이라 했던 곳은 한자로 동곡(東谷) 으로 썼다.
한편 이 지역에 일찍부터 상권이 형성되었던 까닭은 육의전(六矣廛)이 있는 종루가(鍾樓街)이기도 했거니와 관수동 지역에 걸쳐 조정의 하급관리인 역관(譯官)·의원(醫員)·일관(日官)·화공( 工)과 이들하고 연결된 상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웃한 서린동에는 상민들의 감옥인 전옥서(典獄署)가 있었고 이곳에 수감된 죄수들의 식량을 자급자족한다는 미명과 옥졸들의 살림을 보탠다는 이름아래 수감죄수들이 짚신을 삼아 내다 판 곳이 바로 관철동의 혜전(鞋廛)이었다.
따라서 관철동은 궁중 납품상인인 육의전과 죄수의 물품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특히 생활필수품인 소금·갓·관자·청포·짚신상점이 이 일대에 모여 있었던 것은 청계천 건너 삼각동·수표동이 서민집단 거주지역이었던 까닭이다. 갓전골은 관수동의 갓전골과 이어져 있었으며 관잣골은 장찻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신전뒷골은 관철동과 종로2가에 걸쳐 있는 마을로 신전의 뒤쪽에 위치하므로 신전뒷골 또는 혁전후동이라 하였고, 청포후동은 종로2가의 청포전 뒤에 있는 마을이므로 붙여졌으며 청포전뒷골이라고도 하였다.
소금전골은 염동(鹽洞)·염수전(鹽水廛)골이라고도 하였는데 종로2가 75번지와 관철동 15번지 일대이다. 조선시대에는 소금이 국가 전매용품이었으므로 간혹 소금전골에서는 암거래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새벽부터 소금을 사려고 소금전 앞에는 줄지어 사람들이 서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개중에는 시전상인에게 슬며시 웃돈을 주어 정량보다 많은 양의 소금이 매매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마철이 되어 소금의 유통이 여의치 않거나 봄·가을철의 소금 수요가 급증할 때는 소금전 상인은 이같은 방법으로 과외로 돈을 벌 수 있었다.
또한 도성(都城)의 중앙 상가지대에 위치했던 까닭에 옛부터 시전상인들의 거주지가 되기도 했으며 일제 때는 여관과 기사(妓舍)가 있는 동리(洞里)로 유명하였다.
관철동의 모습은 대중음식점, 유흥음식점, 다방업 등의 식품접객업소가 밀집해 있어서 젊은층의 만남의 장소로 손꼽히고 있다. 보신각 주변에 심어진 과일나무는 서울을 풍요롭고 아름다운 거리로 만들기 위해 시도된 것으로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어 도심 가운데 농원의 느낌을 갖게 해준다. 특히 종로2가 뒷길에는 한 때 많은 입시학원이 모여 있었으므로 이 일대가 재수생 골목 또는 학원골목이라는 오명(汚名)도 가진 적이 있었다.
관철동은 서울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교통이 매우 좋으며 지하철 1호선 구간의 종각역이 동 경계선 위에 위치하고 있고, 관철동 10번지에 있는 삼일빌딩은 건축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높은 빌딩으로 손꼽았다. 관철동 43번지에 관수파출소가 있으며 주거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교육기관은 없다.
관철동은 동쪽으로 관수동과 서쪽으로는 서린동과 마주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청계천로가 경계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종로2가와 맞닿아 있다.
(종로구청 홈페이지 발췌)
1. 주요지역
보신각
척화비 있던 곳 (보신각 옆 화단)
3.1운동 기념터 (보신각 앞)
유대치 집터